녹색 광선



델피느(마리 리비에르)는 우울하다. 친구들과 가기로 했던 휴가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다. 엄마, 언니와 아일랜드에 갈 수 있지만 추워서 가지 않고 단체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며 거절한다. 혼자 가는 건 해봤지만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다. 이렇게 그녀가 결정 장애를 겪는 건 그녀의 도무지 알 수 없는 성격 탓이다. 그녀는 새로운 만남을 원하지만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사람들과 함께여도 소외감을 느낀다. 가진 것도 없고 뭘 가졌는지도 모르는데 자꾸 뭘 보여달라고 하냐며 질문에 괴로워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다 포기하고 파리 방구석에 머무는 건 아니다. 그녀는 친구 프랑소와즈의 권유로 노르망디에서 휴가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그녀는 우울하다. 고기를 먹지 않는 델피느는 함께하는 식사자리에서도 혼자고 바다에 가서도 놀지 않고 바라만 본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델피느는 자신을 모른다. 

<녹색광선>은 거칠게 이야기해 여행 영화다. 함께 갈 사람이 없어 방황하는 주인공 델피느의 길을 쫓아간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동기와 목적지가 정해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여정을 쫓는 건 아니다. 영화는 어찌하지 못해 떠나는 어찌하지 못하는 여행을 그린다. 영화에는 무언가 수상한 기운을 풍기는 사물과 장면, 음악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델피느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 델피느가 찾는 무언가를 예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령 델피느가 길을 걷다 바닥에서 스페이드 카드를 줍는 순간, 화면 위로는 기묘한 음악이 흐른다. 델피느가 목장을 거니는 장면에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가 윙윙 울리며, 파리에서의 꽃잎은 쉘부르에서의 꽃송이로 반복된다. 델피느가 나지막한 경사길을 오를 때에는 돌연 쓰고있던 흰 모자가 바람에 떨어지기도 한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수상한 느낌. 영화 초반에 랭보의 말 '오! 시간이 되니 심장이 뛰는구나'란 문구가 인용되는데, 영화는 이러한 징표를 통해 그 순간, 그러니까 심장이 뛰는 순간을 예고하는 것만 같다.  

영화는 날짜별로 진행된다. 7월 2일부터 8월 초까지 달과 일을 쓴 녹색 프랑스어 글자가 이야기를 구분한다. 점점 다가오는 녹색.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 녹색은 중요한 메타포다. 델피느는 녹색이 일렁이는 수풀을 걷고, 카드를 주었을 때 그녀의 옷은 녹색이다. 채식주의자에 대한 대화는 녹색 채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며, 델피느는 녹색 광선이란 가게를 지나간다. 녹색이 암시하는 무언가가 조금씩 느껴지는 장면들이다. 길게 이어지는 대화와 산책 신 역시 녹색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인상을 풍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피상적인 것들, 외형적인 것들의 껍질을 벗기고 점점 어떠한 순간을 향해 접근한다. 특히나 할머니 네 명과 할아버지가 쥘 베른의 책 <녹색 광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녹색이 의미하는 무엇, 델피느가 찾는 순간에 대한 보다 명확한 힌트를 준다. 태양이 질 때 수평선을 따라 퍼지는 녹색 줄기를 의미한다는 녹색 광선. 녹색 광선을 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순간을 델피느는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남자를 만나 처음으로 맘을 털어놓았던 생장뒤리브로에서 맞이한다. 델피느, 그녀가 본 건 무었일까. 외피를 벗은 순수한 자신일까, 그러니까 그녀는 이제 온전히 홀로일 수 있을까. 영화는 '봤다'라고 감탄하는 델피느의 얼굴로 막을 닫는다. 기묘하게 아름다운 공기가 영화의 외연을 감싸 안는다. 

by ABYSS | 2017/04/12 15:43 | Cultur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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