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静かに朝は
by ABYSS
심호흡


어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를 봤다. 어쩌다 오페라 콘서트에 가 '지금 이 순간'과 '나는 문제없어'를 들었고, 어쩌다 사카구치 켄타로가 나오는 <너와 100번째 사랑>을 봤다. 그리고 또 어쩌다 데이빗 O. 럿셀의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보았고, 요즘은 <태풍이 지나가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나레구미의 '심호흡'을 연이어 듣고 있다. 어느 건 지나간 과거를 어쩌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을 얘기하고 있었고, 어느 건 지금 이 현재를 어쩌지 못해 과거를 되돌렸으며, 또 어느 건 과거에 매달려봐야 아무 쓸모도 없다며 현재를 그리고 있었다. 수상한 우연, 기묘한 필연. 필연은 우연의 옷을 입고 온다고 하는데, 내게도 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감지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내 과거가 떠올랐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팻도, <너와 100번째 사랑>의 리쿠도 다 나였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료타는 소설가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흥신소에 취업해 남의 사생활을 엿보고 뒤를 추적하는 일. 취재를 위한 일이라지만 그는 이 생업에 발목이 매었다. 발표한 소설은 이름 모를 상에서 수상한 작품 달랑 하나다. 그는 헤어진 아내를 잊지 못해 매일을 어제처럼 산다. 아들에게 스파이크 슈즈 한 켤레를 사주기 위해 경륜에 매달리고, 아내에게 새로 생긴 남자에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다. 과거의 자국이 너무나 커 오늘이 그려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은 료타가 자신의 아들 싱고에게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아니었다. "되고 싶은 것이 됐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말은 분명 멋지고 감동적이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료타와 그의 엄마(키키 키린이 품이 넓고도 깊은 연기를 펼친다)가 나눈 대화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자리에서 둘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처음엔 편안하게 죽어 없어지는 것과 지난하게 아프다 죽는 것 중 어떤 게 낫냐는 농담같은 얘기를 하지만, 이야기는 곧 삶의 아픔에 가닿는다. 모든 걸 짊어지고 하는 사랑을 할 수 있냐는 말에 료타의 엄마는 말한다. 그럴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을 다 안고 가야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나는 여기서 삶의 모순과 딜레마, 그리고 아름다운 체념과 운명을 느꼈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일본 원제는 <바다보다 더 깊이(海よりまだ深く)다. 바다보다 더 깊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그 삶을 우리는 산다. 아프고 힘들지만 어쩔 수 없다.

사라진 물건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때문에 엄마와 많이 다투기도 했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 없어진 물건들은 꼭 내 삶의 한 조각같아 마음이 에이는 것 같았다. 지나간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돌이킬 수 없음에 답답했다. 시간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앞으로 흘러가기만 한다는데 나에게 내일은 그리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료타는 자신은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닮고 싶지 않은 아빠를 어느새 닮아간다. 미워하는 아빠도 우리 삶의 일부며, 그렇게 닮아가는 게 바로 우리 자신이다. 료타의 엄마가 삶의 이 지독한 순리를 얘기했을 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티파니가 회사에서 모든 남자들과 잤다고 말하며, 그 자체가 자신이며, 그런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지나간 과거와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핸드폰 속 사진에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을 마주할 자신이 생긴 것 같았다. <너와 100번째 사랑>의 리쿠처럼 마법같은 레코드로 삶을 고칠 수 없음을 알았고, 아들, 그리고 전 아내와 헤어지고도 다시 걸어나가는 료타의 뒷모습을 보고 그게 인생임을 느꼈다. 과거가 있어야 오늘과 내일이 있지만, 과거와 이별하지 않고는 오늘과 내일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이제야 깨달았다. "꿈 꾸던 미래 어떤 거였지? 안녕, 어제의 나여. 헬로 어게인, 내일의 나여"
by ABYSS | 2017/06/01 16:06 | Ein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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