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静かに朝は
by ABYSS
덩케르크


총알을 피해 달아나던 남자는 아군을 만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여유도 없이 뛰기 시작하는데 그가 향하는 것은 적군을 향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망을 친다. 도망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전쟁을 하기 위한 전쟁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도망을 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분투이고, 삶을 향한 인간의 본능적 욕망에 대한 장대한 그림이다. 영화에는 전투가 묘사되지 않고 적군이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조직 내의 갈등, 싸움 역시 나오지 않는다. 화면을 채우는 것은 오직 '살려줘'라는 말이거나 '나도 데려가줘'란 말들 뿐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도망을 가기 위해 애를 쓴다. 나는 이 생소함이, 전쟁 영화임에도 겁을 내는 이 나약한 태도가 <덩케르크>의 크나큰 성취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영화는 전쟁이라는 흉포하고 잔혹한 폭력의 실상이 얼마나 인간을 피폐하게 하는지를 배우들의 얼굴로, 표정으로 말을 한다. 도버 해엽의 광대한 풍경을 배경으로 무겁게 발걸음을 내딛는 병사들과 폭격이 잠시 그친 사이 바닥에 주저 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 그 아무 것도 없어 황폐한 얼굴이 보여주는 건 전쟁의 광포한 살기이며, 하루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이다. 강함을 다투는 전쟁 영화가 인간의 약함을 드러냈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덩케르크>는 겁을 내는 전쟁 영화지만 동시에 그 겁에 대한 존중이 깃들여있다. 

간신히 덩케르크에서 무사히 철수를 완수한 영국 군들은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노인의 태도가 눈에 띄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채 병사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빵을 건넨다. 그런데 나는 이 노인의 태도가 곧 영화의 태도인 것처럼 보였다. 겁을 냈고, 부끄러울 만한 일을 했음을 얘기하지 않겠다는 은연중의 약속, 누구나 전쟁 앞에선 기죽을 수 있고 약해질 수 있다고 믿는, 그러니까 괜찮다는 무언의 격려. 노인은 한 병사가 '그저 살아 돌아왔을 뿐인데'라고 말하자 '그거면 충분해'라고 답한다. 동시에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수훈 공을 세운 병사가 임무를 마치고 자신이 탔던 비행기를 불태워버리는 장면은 이 영화가 전쟁의 공이란 건 존재하지 않고, 있을 수도 없는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가 아니다. 전쟁을 겁내는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덩케르크>는 전쟁을 무화 시키는 영화고 전쟁의 성립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영화다. 당연히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래서 나는 <덩케르크>가 놀란의 최고작임과 동시에 최고의 전쟁(을 소재로 다룬) 영화 중 한 편이라고 마음 먹었다. <덩케르크>는 그냥 <덩케르크>다. 

by ABYSS | 2017/08/10 12:38 | Cultur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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