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静かに朝は
by ABYSS
도쿄에 흐르는 '어쩌면'의 시간, 도쿄 그리고 나.


'태어난 곳이 모국일 순 있어도 꼭 머물 자리는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내가 그랬다. 2007년 겨울 처음으로 도쿄를 방문한 뒤 10년이 넘게 지나, 아마도 50번째 쯤 되는 도쿄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언제, 어떻게 일본이 좋아졌는지 명확하게 얘기를 할 순 없지만 어느새 일본은 어쩌면 한국보다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일본 드라마에 빠져 대학 시절을 보냈고, 잡지나 책을 사모으며 일본을 살았으며, 20대의 마지막 해를 도쿄 미타카다이(三鷹台) 작은 방에서 보냈다. 어쩌면 그저 멋지고 새로운 스타일에 끌렸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저 여기에 없는 무언가에 대한 동경이었는지 모른다. 그냥 시작한 일본어 공부는 나와 궁합이 나쁘지 않았고, JLPT 1급은 한 번에 따냈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새, 삶이 방향을 틀고 있었다. '씨네21'에서 만난 일본 영화계의 사람들, 처음으로 해본 일본어 라디오 방송과 통역, 통역의 도움을 덜어낸 여러 번의 인터뷰와 일본 만으로 완성한 소박하고 초라한 책 한 권. 하지만 나를 일본으로 이끈 건 그저 하나의 문화나 유행, 트랜드는 아닌 것 같다. 막다른 길에서 일본이 보여준 건  여기가 아닌 어딘가의 시간이었고, 그곳에 흐르는 선율과 문장, 어둠에서도 여린 빛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는 너무나도 편안했다. 나흘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서른 일곱번의 마침표에서 나는 지금 이런 글을 쓴다. 

시부야 하치코 버스는 비행선 같다.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땀을 닦아내며 길을 걷다 마주치는, 그저 시부야란 이름의 가공의 버스처럼 느껴진다. 타워 레코드 앞의 고개를 갸우뚱 하고있는 하치코, 도쿄 역 개찰구 주변을 둘러싸고 그려진 하치코처럼 하치코 버스는 또 하나의 시부야, 어쩌면 도쿄인지 모르겠다.  100엔 이라는 저렴한 가격, 시부야를 중심으로 에비스, 다이칸야마, 우에하라(上原), 요요기 등을 잇는다는 장점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찌든 하루의 한복판에서 거리를 달리는 귀여운 하치코를 마주할 때 느껴지는, 정말 잠깐의 한숨만으로 하치코 버스는 충분하다. 여기가 시부야임을, 그곳에 내가 있음을 하치코 버스는 아무렇지 않게 일러준다. 나는 멈춰있는 하치코를 본 적이 없다. 하치코 버스를 탔다. 구글 지도로도 검색되지 않는 정류장을 찾아 도겐자카(道玄坂)와 마크시티를 10분 넘게 헤맸고, 돈키호테에서 구입한 페이셜 티슈를 세 장이나 쓰며 하치코 버스를 탔다. 토요일 늦은 오후. 버스는 붐볐다. 금새 만원이 됐다. 하지만 차내는 고요했다. 여기는 일본이다. 백팩을 앞으로 돌리고, 손에 든 무인양품과 유나이티드 애로즈의 쇼핑백을 조심히 한 쪽으로 모아 한 꼬마 아이 앞에 섰다. 이렇게 타인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 싫지 않다. 타인의 자리를 생각하며 남겨진 나의 자리를 바라본다. 스크램블 교차로 한 쪽에 조용히 나란히 선 줄.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과 그 속에 나. 시부야의 시끄러운 데시벨 속에 흐르는 어떤 고요함. 여기는 도쿄다. 


하리츠(ハリッツ)에 도착했다. 푸드 트럭에서 시작해 올해로 13년째를 맞는 요요기 우에하라(代々木上原)의 도너츠 가게다. 우에하라 니쵸메에서 10분을 걸어야 하고, 꽤나 긴 줄을 견뎌야 한다. 역시나 많은 사람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36도를 넘는 날씨에, 10분을 걸어온 나로서는 고된 장면이다. 게다가 나는 시부야 도호 시네마에서 '만비끼 가족' 티켓을 구매해놨다. 다시 페이셜 티슈를 꺼내 땀을 닦아내며 사람이 줄기를 기도했다. 작은 민가를 개조한 듯한 가게엔 귀여운 모형의 메뉴판이 걸려있었고, 맞은 편 옷집에서 나온 듯한 남자 손엔 새하얀 바탕 위에 가게 이름만이 조그맣게 쓰여진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40분이 지났을까.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남은 도너츠가 30개 뿐이며, 1인당 3개까지 구매를 제한하고 있다고.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여기서부터는 위험하다고. 내가 선 자리는 그 '까지'와 '부터'의 정중앙이었다, 운명의 기로에서 나는 매우 소박해졌다. 세 개를 구매해 내가 만든 책과 함께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매우 가녀린, 어쩌면 남아있을 도너츠, 그 작은 '럭키'를 기대하는 마음이 떠올랐다. 도너츠는 샀다. 살 수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세 개는 고르지 못했지만, 몇 컷의 사진도 찍었다. 무너질지 모를 시간에서, 남은 기대를 바라보는 마음, 누군가의 배려가 안겨준 두 개의 도너츠. 그렇게 채워진 도시. 하리츠의 도너츠는 조금 무게 있는 포근한 맛이 났다. 

내가 탄 하치코 버스는 '언덕을 넘어 루트(丘を超えてルート)다. 시부야 서쪽 출구를 시작으로 도큐 백화점, 동경대 앞과 뒤, 토미가야(富ヶ谷)와 요요기 우에하라 등을 지나는데 사실 이렇다할 구경거리는 없다. 그저 조용한 주택과 거리, 깨끗한 마을과 가게가 이어지고 다시 시끄러운 시부야 한복판에 도착한다. 문이 하나이지만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의 순서가 썰물과 밀물같아 조금의 혼잡도 없고, 누구도, 조금도, 전혀 서두르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꼬마 아이의 엄마가 내게 자리를 양보했다. 아이 혼자 한 자리를 차지하는게 미안했는지 고맙다는 말에 그저 목례만 한다. 도쿄라는 이름의 삶을 보았다. 시부야라는 이름의 시간을 느꼈다. 혼잡 속에서 정적을 지켜내는 도쿄는 배려 이후 남겨진 자리로 흘러간다. 돌아가는 길, 틀린 길을 알려준 구글 지도를 탓하며 건너오는 여자에게 길을 물었다. 아직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른다는 그녀는 (구글이 알려준 것과) 정반대편을 가리키며 버스 정류장이 있다고 말했다. 고맙다는 인사 이후 조금 길게 이어지는 시선에 그녀를 바라보자 '목걸이가 비슷한 거 같아서요'라 말한다. 그러고보니 그렇다. 그녀는 손에 들고있던 샌들을 신기 시작했다. 맨발로 걸어왔나 보다. 버스를 기다리며, 산책에 나서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지나가는 버스 기사의 '타지 않겠냐'는 상냥한 말에 짧게 답을 하며, 시부야 토호 시네마 7관에 앉았다. 비좁은 로비에 앉을 자리라곤 거의 보이지 않는, 돈 냄새만 풀풀 풍기는 곳이었지만 시부야는 시부야다. 도쿄는 도쿄다. '만비끼 가족'은 가족 뒤에 가려진 사람의 이야기를 그렸다.


일본어에서 온도를 느낀다. 유키사다 이사오의 '나라타쥬'에서 변함없다(相変わらず)는 변하지 않는 사랑(愛、変わらず)이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만비키 가족'에서 상처(傷)는 상처(傷)와 만나 인연(絆)이 된다. 괴롭다는 뜻의 츠라이(辛い)에 획 하나를 더하면 행복하다(幸せ)가 되고, 생긴 것도 의미도 전혀 다른 차이(違い)와 힘(力)은 같은 소리로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 시부야 구의 슬로건은 '차이를 힘으로 바꾼다'다. 찰나(刹那)와 애절함(切ない)이 단 하나의 소리, 단 하나의 문자만 많고 적은 건 그저 우연일까. 히라가나와 카타카나, 한자, 그리고 훈독과 음독이 혼용되는 일본어 특유의 성질 때문이겠지만 여기엔 이러저러한 것, 그러니까 다양성, 나아가 보이지 않지만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르는 무언가에 대한 자리가 느껴진다. 일본은 '아마도'보다 '어쩌면'의 나라다. 우리가 혐오스런 사진으로 금연을 협박하는 사이 일본은 흡연 매너를 얘기하고 있고, 영화관엔 추울 지 모를 누군가를 위한 담요가 마련되어 있다. 소위 일본 특유의 서비스, 접객, 디테일이라 불리는 것들은 '어쩌면'에 대한 존중이다. 거기서 비롯되는 섬세함, 예민함, 그렇게 만들어진 시간에 많은 위안을 받았다. '우유가 커피에 스며드는 시간'을 얘기하는 후지파브릭(フジファブリック)의 노래, '커피에 떨어지는 누군가의 말들'을 생각하는 람프(ランプ)의 선율, 가족의 굴레에서 개인의 시간을 바라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와 우울과 외로움으로 빛을 밝힌 사이하테 타히와 이시이 유야의 도쿄. 그러니까 멜랑꼴리가 쌓여가는 그곳. 일본의 담배 회사 JT의 캐치 카피는 '사람의 시간을 생각하다(ひとのときを、思う)고, 나는 신주쿠 란푸루(らんぶる)란 카페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란푸르는 70년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일본도 변한다. 도쿄는 메트로폴리탄이다. 종이 광고만 가득했던 지하철에도 LCD 패널을 이용한 광고가 등장했고, 2020년 올림픽을 앞두고 시부야의 이곳저곳은 거의 새단장 수준의 공사가 한창이다. 하지만 그렇게 변해가는 날들 속에서도 일본은 남아있는 것들의 자리를 생각한다. 세 개의 패널을 이용해 만들어진 야마노테선 차내의 광고는 흡사 잡지의 한 면을 떠올리게 했고, 아직도 버스에서 울리는 아나운스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녹음된 음성이 아닌 운전대를 잡은 버스 기사의 목소리다. 이렇게 도쿄는 메트로폴리탄 곳곳에 아날로그의 흔적을 남긴다. 개인주의의 나라, 차갑고 건조한 도시 도쿄라고 하지만 일본은 누구의 자리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미야마스자카(宮益坂)를 지나 온 더 코너(On the Corner)로 향하며 레코드숍 타워레코드에서 한 숨을 식혔다. 헤드폰을 끼고 새로 나온 우타다 히카루의 앨범을 듣는 순간 식어가는 땀방울과 함께 지나간 시간의 향수가 다가왔다. CD에 담긴 날들, 애니메이션 굳즈를 사기 위한 행렬 속에 흘러가는 오래전 기억의 흔적. 우타다 히카루의 새 앨범의 타이틀은 첫 사랑(初恋)이고, 나는 유튜브에서 그녀의 오래된 노래를 찾아봤다. 사실 방법이 없었던 건 아니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도쿄까지 날아오지 않아도 달리 길은 있었다. 하지만 왜인지 다른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고, 사람이 객관적으로 사는 건 아니다. 도착 후 나리타 공항에서 늦은 점심을 위해 방문한 도쿄 수프 스톡(Tokyo Soup Stock)에서 점원은 내게 '오랜만이네요'라고 말했다. 단골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녀의 기억력이 좋았던 것도 아니다. 단지, 1000엔 마다 한 번의 도장을 찍어주는 스탬프 카드에 나와 그곳의 기억이 있었다. 남아있었다. 아마도 51번째 도쿄, 아니 어쩌면 51번째 도쿄. 내가 없던 자리에서 지나간 나를 보았다. 

by ABYSS | 2018/07/23 19:42 | Ein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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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지노 at 2018/07/25 17:44
유려한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JT社의 캐치 카피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군요.
Commented by ABYSS at 2018/07/28 09:23
저도 보고 마음이 움직였던 카피에요. 이들의 흡연 매너 캠페인 내용이 여러가지인데 보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좋아져요.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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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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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공감되는 글이네요.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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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보고 마음이 움직였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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