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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루시!'가 사실 그리 별난 줄거리의 영화는 아니다. 무언가의 만남으로 시간의 방향을 틀고, 숨막히는 시간에 창을 열어 숨을 깊게 들이쉬는 이야기는 루시의 클래스 메이트, 톰을 연기한 야쿠쇼 코지의 영화 '쉘 위 댄스'만 봐도 그리 색다르지 않다. '쉘 위 댄스'의 스기야마는 춤을 추고, '오 루시!'의 세츠코는 영어를 배우지만 둘이 맞이한 시간은 분명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하지만 '오 루시!'는 조금 더 보이지 않는, 조금 더 울퉁불퉁한, 조금 더 여기와는 먼 곳의 이야기를 그린다. 어엿한 가정의 한 가장인 스기야마와 마흔이 넘어 홀로 살아가는 세츠코의 시간은 어김없이 이해될 수 없는 차이이지만, 그보다 영어와 일본어라는 차이, 그렇게 견고한 벽, 이해와 소통이 아닌 체념과 포기를 택한 시간을, '오 루시!'는 살아간다. 일본어를 버리고 어설픈 영어를 선택한 삶, 최선이 아닌 차선의 시간. 루시의 발음을 무시하는 점원의 조롱에서 루시를 구해주는 건 고작 단어 몇 개로 이야기를 나누는 영어 선샌님 존(조쉬 하트넷)이고, 서로 절반 정도밖에 알아듣지 못하는, 일어와 영어가 뒤섞인,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은 밀린 집세에 난처해진 존에게 민망한 대신 고마움을 남긴다. 반쯤 열린 문 앞에서의, 서툴고 모나고, 자꾸 넘어지는 시간은 일본어도, 영어도 아닌 그저 사람과 사람의 시간이고, 나는 그 짧지 않은 불통의 시간이 왜인지 예쁘고 아름답다. 세츠코의 조카 미카(쿠츠나 시오리)가 더 많은 대화를 하는 건 엄마(미나미 카호)가 아닌 이모다. 세츠코가 유일하게 회사 밖에서 말을 하는 건 언니가 아닌 조카다. 엄마와 딸, 이모와 조카. 명확히 가깝고 먼 현실 속의 관계가 영화에선 서로 자리를 바꾼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많이 알지 못해서, 좀처럼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순간이 영화엔 흐른다. 회사를 그만두고, 병원에서 나와, 그렇게 2년이 흘러. 누군가는 멀어졌고, 누군가는 남아있다. 우연히 연락이 된 오래 친구와 메일을 주고받다 알 수 없이 연락이 끊겼지만, 나는 왜인지 이유를 알 것 같다. 답변이 도착하지 않은 자리에 또 하나의 메시지를 남기려다 나는 그냥 마음을 접는다. 그저 가발을 쓰고 그냥 입에 탁구공을 문다. 세츠코가 해고되다 시피 회사에서 나오던 날 그에게 다가온 건 동료 그 누구도 아닌 서랍에서 굴러 떨어진 탁구공이었고, 존을 생각하며 처음으로 팔목에 새긴 태투 '愛'는 존이 아닌 톰의 품에서 눈물을 흘린다. 풀린 오해보다 남아있는 기억이, 외면할 수 없는 상처보다 통역되지 못한 말들이, 어쩌면 추락 직전 플랫폼 위의 어둠을 구한다. 그건 아마 가발 안에 숨겨진 마음이고, 탁구공이 전하는 서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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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 꿈이 그림처럼 느껴지..
by ABYSS at 01/11 전 잠이 들기 전, 아직 의식.. by rumic71 at 01/10 사실 되게 고혹한 시간일 수.. by ABYSS at 12/25 최근 등록된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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