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9일
가장 매력적인 도망, '로마'

'로마'만큼 극찬을 받는 영화는 아마도 올해 보지 못한 것 같다. 할리우드에서의 몇 작품을 마치고 자신의 고향에 돌아와 가장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그의 '로마'는 사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마치 아트 피스와 같은 장면은 상징이 되어 극을 물들이고, 치열한 역사에서 한 발 물러나 개인의 마음을 응시하는 풍경은 아프고도 애절하다. 영화엔 남자와 폭력의 역사가 있고, 배제와 차별의 역사가 흐른다. 하지만 영화는 피가 난자하는 현실의 역사를 바라보는 대신 밖에 나가고 싶어 시종일관 점프를 해대는 검정색 강아지와 새장에 갇혀 그저 지저귀기만 하는 새들, 그리고 강아지가 밖을 나갈까 싶어 목줄을 붙잡고 주인을 배웅하는 클레오를 바라본다. 간만에 외출을 한 클레오 곁을 군인들이 나팔 소리를 울려대며 행진을 하는데도 그런다. 클레오는 집에 갇힌 검정색 강아지이기도 하고, 새장 속 새이기도 하며, 어쩌면 주인 여자가 성을 내는 바닥 곳곳 개가 쌓아놓은 똥일지도 모른다. 똥은 싼 놈이 치운다고 클레오는 묵묵히 바닥의 똥을 쓸어담는다.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알포손 쿠아론 감독은 '현대의 유령이 오래 전 시간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으로 찍었다'라는 말을 했다. 그만큼의 거리가 나는 '로마'에서 떠나지 않는다. 영화는 감독이 어릴 적 살던 집의 이러저러한 일을 해줬던 여인을 주인공으로 했고, '로마'는 그만큼 진실한 영화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바라본 하늘에서 클레오는 클레오가 아닌 무엇이어야만 한다. 그녀는 왜인지 수행 중인 남자들도 못하는 동작을 아무런 수고없이 유일하게 해내고, 가혹하고 비참한 이별 장면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그녀에겐 주인이기 이전 같은 여자인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와 소피아의 엄마가 있지만, 클레오의 아이는 죽어서 태어난다. '로마'가 바라보는 클레오는 아마도 여기가 아닌 어느 곳에 있는 듯 싶고, 그렇게 아프고 또 슬프다.
클레오의 뱃속 아이를 위해 침대를 사러 간 날의 소동 이전까지, 영화는 마치 별 일 없듯 고요하다. 클레오는 매일 하는 당연한 일을 그저 당연하게 하고, 소피아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이들을 불러 편지를 쓰게 한다. 하물며 클레오가 집을 벗어나 가장 먼 길을 가는 건 임신 사실에 부리나게 도망친 남자에게 옷을 건네주기 위해서다. 시끌벅적 떠드는 소피아의 아이들을 제외하면, '로마'에선 왜인지 이상하게 사람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들은 총을 갖고 놀고있고, 서로 장난감을 빼앗기지 않으려 싸우기도 한다. 마치 폭력의 역사를 은유하기라도 하듯 영화는 아이들을 상징 안에 가두어 버린다. 물론 후반부 소피아와 클레오, 그리고 아이들이 집을 떠나 바다를 지나 여행을 가는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수영도 못하는 클레오는 파도에 휩싸인 아이들을 구해 부둥켜 안고 처음으로 감정을 토로하기도 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다시 마당에 나와 계단을 오르고, 펼쳐지는 하늘이 나는 그저 허무하고 무력하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흐르는 무언가는 현실에 있지만, 영화는 그 무언가를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바라본다. 심지어 나는 클레오가 성모 마리아를 은유하는 건 아닐가 싶은 생각마저 했다. 집에 돌아온 클레오의 하늘은 아마 다시 바닥을 청소하는 불거품에 휩싸인다. '로마'는 분명 훌륭한 영화다. 꼬이고 꼬이고, 쌓이고 쌓인 분노와 피의 역사를 영화는 클레오의 시간으로 이야기한다. 어쩌면 현실 곁에 예술이 자리해야 하는 자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건 아마 가장 치열했던 멕시코 역사 곁에 흘러가고, 영화엔 이를 보지 않으려는, 관망하는 듯한 시선이 있고, 나는 '로마'를 보고 여전히 그저 한움큼에 불과한 희망만이 떠올랐다. 마치 소피아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TV 속 '우주 탈출'을 보듯이.
# by | 2018/12/29 16:26 | Cultur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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