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1월 27일
끝나지 않는 길 위의 영화, '더 서치'

체첸 지역을 피해 거리를 일일히 숫자로 기록하며 시작하는 영화는 '전쟁'이란 이름의 인간을 '지금', '여기' 누군가의 '현실'로 데려온다. 총을 겨누는 누군가, 부상입은 사람을 구조하는 누군가, 시체에 조롱 섞인 말을 던지는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누군가, 그리고 길가의 싸움을 보고 모른척을 하는 누군가와 겨우 구한 빵을 강탈하는 또 다른 누군가. 여기서 누군가는 모두 다 사람이고, 잔인하게도 인간의 오른손이자 왼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에 걸친 전쟁, 고작 두 달 동안 10만명의 사상자를 낳은 가혹한 현실을 스크린에 담으면서도, '더 서치'는 몇몇의 출구을 비쳐보인다. 배가 고파 빵을 멀그러니 쳐다보는 아이를 향해 자동차는 후진하고, 말문을 닫은 아이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여자는 차에서 내려 조심스레 집 계단을 오른다. 어김없이 인간이지만 알 수 없이 타인을 향하는 시선, U턴, 소리를 죽인 발걸음, 그리고 짧은 돌아봄. 영화에는 피난민을 도와주는 EU의 인권위원회 직원 캬홀(베레니스 베조)이 등장하고, 구조 업무에 정신이 없는 피난소의 헤렌(야네트 베닝)이 있지만, 영화가 돌아보는 건 인권, 구조라는 딱딱한 말, 페이퍼 워크(paper work)에 그치는 것들이 아니다. 영화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 아직 인간에게 남아있는 것들을 향해있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리포트를 작성하는 캬홀의 시간에 담겨있지 않는 것들. 캬홀이 영화의 주인공 하지(압둘 칼립 마마츠예프)를 집 안에 들이기까지는 영화가 절반이나 지나고서다.
사실 '더 서치'는 클리셰에 기대는 부분이 없지 않다. 영화 초반 어린 아이가 그 보다 더 어린 아이를 안고, 무너지고 박살난 거리를 정처없이 걷는 장면은 전쟁과 폭력을 비판하는 둘 도 없는 명장면이다. 나는 이런 아픔과 슬픔에 어느 정도의 눈물을 떨궈야 하나 고민을 할 때가 있다. 게다가 피난민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사무실에 앉아 전화를 하며 한숨을 내시는 캬홀의 모습은 그저 틀에 박힌 인권 관련 기관의 성실한 직원일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전쟁이란 폭력, 도움이라는 인권의 손길,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타인의 고통과 헤렌으로 대변되는 인권 운동의 어떤 이상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갈림길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가 말문을 열고 캬홀에게 다가간 건 캬홀이 거친 도로를 돌아 다시 그에게 다가왔던 시간의 결과이고, 그건 물을, 식량을, 집을 주고 그들을 파괴의 시간에서 끌어내는 것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이야기다. 하지가 남의 물건을 훔쳐 캬홀에게 선물이라 건네며 목걸이를 들이밀 때, 그가 '매번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라고 조심스레 이야기할 때, 영화는 아직 남아있는 사람의 가능성, 페이퍼 워크 이상의 희망을 보여준다. 물론 하지가 누나를 찾았을 때 캬홀은 알 수 없는 상실의 길에 홀로 서고, 하지의 내일은 여전히 폭력의 여파 속이겠지만, 'The Search'의 종착점, 그런 건 애초 인생에 없다. 누나를 찾았어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 집을 복구하고 식량을 갖췄어도 이어지는 아픔, 잔인하게 2시간 15분의 기나긴 여정은 엔딩에 이르러 다시 시작과 만나고, 이 영화의 반전은 우리가 품고있는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하고, 하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내일을 닮은 반전이다. 사람에겐 다행히 왜인지 그저 뒤를 돌아보는 알 수 없는 무언가, 어쩌면 선함이 있다.
# by | 2019/01/27 14:20 | Cultur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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