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静かに朝は
by ABYSS
세상 반쪽이 그리는 로맨스, 모리스
낙서는 지워지지 않았다. 해변에 힘겹게 그려낸 낙서는 썰물에 사라지지만, 어쩌면 지워지지 않았다. 1971년 출간된 E.M 포스터의 소설 '모리스'를 원작으로 제임스 아이보리가 1987년 완성한 '모리스'는 해변에 스쳐간 어떤 찰나의 이야기다. 20세기 후반 제복을 입고, 정해진 말만 쓰고, 정해진 사람과 사귀고, 관계를 갖는 자연 아닌 자연에 살던 시절, 그 말은 왜인지 그리도 힘들어 말이 아닌 낙서가 되었다. 아빠가 부재한 홀(올란도 웰즈)은 어느 오후 학교 선생님과 함께 해변을 걷는다. 선생님은 소년에서 남자, 남자와 여자, 그리고 둘의 어떤 시간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라고는 해도 그 말엔 알맹이가 비어있고, 에드워드 시대 영국에서 그건 좀처럼 말이 되지 못하는 말, '신성한 비밀'이다. 젖은 해변에 나무 막대로 간신히 힘겹게 그려지는 인간의 어떤 자연. 자리를 뜨려던 선생님은 아차 싶은 맘에 발길을 돌리지만, 썰물 뒤엔 파도가 밀려오고, 비밀은 여전히 비밀이곤 한다. 하지만 영국 남서부 해안을 배경으로 한 길 위에서, 고작 발걸음밖에 남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밀물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1913년에 쓰여진 소설은 E.M 포스터 사후에나 발간되었고, 그만큼 뒤늦게 찾아온 썰물 속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담과 이브가 아닌, 조금 흐렸던 날 파도가 남기고 간 흔적의 로맨스. '모리스'는 영화 주인공의 이름이지만, 지나간 어떤 애잔했던 시절의 이름이기도 하다.

20세기 초, 에드워드 시대는 규제와 차별, 형식과 권위가 조금씩 틈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시절이다. 정해진 틀과 형식에 갖춰 재단된 마을은 정연한 자연의 한 폭같지만, 그건 동시에 금욕과 절제가 가려버린 풍경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플라톤을 이야기해도, 기독교의 수 백 년 전 교리를 이야기해도, 어딘가 돌아가야 하는, 등을 돌리고 피해야 하는 길목이 어김없이 드러난다. 캠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홀(제임스 윌비)은 보다 더 규제와 틀에 짜여진 날들을 보내지만, 그만큼 가려졌던 자리의 자욱은 새어나온다. 귀족 출신에, 별장을 소유하고,  그야말로 앞날이 창창한 클라이브(휴 그랜트)와 시골 마을 유지 집안에 사업으로 가세가 등등한 모리스 가문의 홀. 빈틈없이 짜여진 우아하고, 고상한, 아름답고 귀품있는 날들에 '그 날'이 찾아온 건 어쩌면 보다 자연스러운, 가장 본래의 자연의 그림일지 모른다. 우정과 사랑, 남자와 여자, 쓰여진 글자 사이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감정이 있고, 비밀이 되어야 하는 순간은 영화를 물들이기 시작한다. 영화는 소설에 담긴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감정을 조심스레 가져오며 가리어진 자연의 작고, 미세하고, 여린 떨림을 잡아낸다. 감추어야 하기에 간절하고, 드러낼 수 없어 진실한 순간이 화면에 미동을 그린다. 조여맨 벨트, 목 아래까지 잠근 버튼을 하나 풀어낼 때의 아찔한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다. 낙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영화는 홀과 클라이브, 그리고 클라이브의 별장에서 일을 하는 알렉(루퍼트 그레이브즈), 세 개의 추로 움직인다. 도덕과 이성, 논리의 세계를 쫓지만 크라이브의 마음은 왜인지 자신을 향하고, 가장 아름다운 관계라는 '우정'은 현실이 되지 못한 '자연'의 박제된 풍경일 뿐이다. 책을 건네며 마음을 전해보지만, 활자에 봉인된 '마음'은 좀처럼 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함께 세상을 논했지만, 항상 빈틈을 응시하던 리즐리(마크 탠디)가 군인 병사와 이곳이 아닌 저곳, 선 너머의 어딘가에서 일종의 '불온한 행각'을 저지른 뒤, 세상이 그들을 재단하기 시작하며, 클라이브는 눈을 감고 홀은 '너머'를 바라본다. 숨겨왔던 벽돌 틈새 자연이 드러난 순간, 오래된 저택 지붕에 빗물이 새어 떨어지던 저녁, 부정했던 마음 한 구석의 그리다 만 낙서가 떠오르는 찰나. 영화는 친척 아저씨의 힘을 빌려, 수소문해 알아낸 체면술사의 집을 방문해 홀의 마음을 제자리로 돌리려 하지만, 비 새는 지붕을 고친다 한들, 본래의 지붕이 되지는 못한다. 어김없이 동성애가 금기시 되던 시대, 세상의 반쪽만이 존재하던 시절의 고리타분한 서사이다. 그럼에도, '모리스'는 억압에도, 수 백 년 이어진 견고한 질서에도, 금욕에서 새어나오는 어쩌면 가장 순수한 '사랑'을 끌어낸다. 클라이브가 자신의 '모럴'을 변명하기 위해 플라토닉을 이야기할 때, 고작 사랑 하나를 위해 이렇게나 애쓰는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끊임없이 부정하고 도달한 곳, 수없이 의심하고 찾은 마음. '사랑'의 역사는 이곳에서 쓰여졌다.
by ABYSS | 2019/11/09 12:28 | Cultur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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