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静かに朝は
by ABYSS
그의 '망상’과, 그녀의 '논픽션'

지난 여름 누나가 지나가는 말로 건넨 한 마디에 책을 한 권 주문하고, 하다보니 보통이 아닐 것 같아 한 권 더 주문하고, 계획대로라면 벌써 결론이 나왔지만, 수 차례나 시험을 흘려보내고, 아직도 페이지는 중간 어디 즈음에 있다. 사실 자격이 있다고 해서 무엇하나 달라지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그 자리에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었다. 어차피 목표 같은 말들은 친하지 않았으니까. 회사를 나온지 시간은 흘러흘러, 이미 4년째가 되었는데, 우울이 스쳐가는 시간이 달리 느껴지는 걸 보면, 나도 나이를 먹었다. 처음으로 단행본을 한 권 번역하고, 갈무리에 가까운 번역 작업을 또 한 번 마치고, 생애 첫 책을 작업하며 꽤나 오래 전 그 드라마를 지금 보았다. 교열과 편집과 내일과 지금에 관한 이야기. 이른 새벽 누군가는 '지금이 아니라 미래의 망상 속 나를 보아라'고 조언아닌 조언을 했는데, 별 거 아닌, 나랑은 어울리지도 않는 그 말이 위로가 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만드는 사람들. 알듯 모를 듯 아리송한 이야기 속에 알 수 없는 내일을 만들어준 오늘들을 떠올린다. 고작 나는 오래 맘 속에 묵혀둔 마츠자카 토오리의 '망상'을 구입하고, 오자키 세카이칸의 실패와 우울의 밀도 100% 에세이 '유스케'를 주문하고, 지금은 이미 하루가 끝나가는 저녁 끝무렵이지만, 사카이가 홀리데이 콜렉션으로 내놓은 머그 세트를 테이블 한 켠에 두고싶다. '논픽션'에도 희망은 있으니까.

오래 전, 아주 오래 전 이 책을 샀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그 날이 기억난다. 시부야 파르코 지하, 계산을 하며 카운터 옆 놓여있던 작은 책을 한 권 더 집었던 저녁. 도쿄에서 스시를 먹으러 갈 때마다 마음이 복잡해지던 걸 떠올리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펼쳐본다. 스시를 먹는 법, 50종이 넘는 네타를 모두 소개하며 주문을 도와주는 책. 세계 최초의 여자 스시 장인이라는 치즈이 유키를 만난 건 이 책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 모르지만, 나는 방 구석에 자고있던 내일을 잊어버리는 일이 종종 있곤한다. '세계 최초'랄지, 유일무이랄지, 그런 말들에 웬만하면 의심을 품고 보는 성미이지만, 그곳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나는 할 말이 별로 없다. '여자는 체온이 높아 생선이 상한다.' '생리 때문에 미각이 고장난다.', '메이크업이 요리에 떨어진다.' '하고싶으면 머리를 밀어라.' 고작 생선 하나 가지고 뭘 그리 정색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그곳에 여자가 있지 못할 이유는 사실 어디에도 없다. 치즈이는 내게 유일하게 '보수'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었고, 그곳에 필요한 당당함을 이제야 안다. 200년 철통 같은 스시 업계에서, 그것도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그렇게 애달픈 스시는 태어나고 있다. 오늘 그녀의 이야기를 마치고, 오래 전 쌓아놓은 책의 페이지를 펼치고, 덕분에 나는 이제 스시집에 가 마음을 펴고 주문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타인이란, 어쩌면 이런 배움이곤 한다. 



by ABYSS | 2019/11/26 21:10 | Ein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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