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静かに朝は
by ABYSS
그 해 난, 여름의 뒷면을 보았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여름이 스쳐간 영화를 좋아한다. 어쩌면 비교적 흔한 말이라 새삼 별 다른 고백도 되지 못하지만, 여름이 흘러간 영화엔 (좀 부끄럽지만) 나만 아는 뭉클한 엔딩이 묻어있다. 어느새 찾아와 어느덧 끝나버리는 여름처럼, 뒤늦게 바라보는 계절의 그림자가 그곳에 일렁인다. 가깝게는 미야케 쇼타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바라보던 새벽녘과 같은, 이시이 유야 감독의 '도쿄의 밤하늘은 가장 짙은 블루'에서 최고 밀도로 빛나던 우울의 하늘처럼, 세상 어떤 작은 벌레도 목청을 높여 노래를 할 것 같은 묘한 설렘이 너와 나 사이에 가득하다. 왜인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왜인지 자유로운 듯한, 왜인지 내가 아닐 수 있을 것 같은 몽상이 뙤약볕처럼 쏟아졌다 사라진다. 이마에 샘솟는 땀방울에 알아차리고, 몇 번의 거센 비를 맞으며 거리를 걷고, 늦은 저녁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올라치면, 여름은 떠나고 없다. 그렇게 현실이고 현실이 아니다. 세상은 여름을 청춘에 빗대기도 하는데, 내게 잠시 스쳐가는 그 찰나같은 시절을 여름은 은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뉴스를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8월 끝무렵. 오래 전 기억 속 기타노 타케시의 영화를 꺼내봤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그 해 여름은 작은 칼질과 함께 시작했다. 무슨 이런 살벌한 문장이 있을까도 싶지만, 별 음악도, 대사도 없던 영화에서 처음으로 음악이, 히사이시 죠의 몽롱한 사운드가 새어나오는 그 '칼질'의  순간은 내가 알던 여름의 문턱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무언가 새로운 계절이 시작하려하는 설렘. 보드가 결국 스티로폼이구나 싶은 하찮은 발견도 하게되지만, 움츠리고 있던 마음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는 듯한 순간. 그 해 가장 조용한 바다는...여름을 시작하려 한다. 영화는 청소부로 일하던 (아마도) 전직 서퍼 시게루와 그의 여자 친구 타카코의 며칠을 그저 함께 걸어가는 날들의 기록일 뿐이지만, 여름, 그리고 바다에서의 며칠. 어쩌면 놓치고 온 그 날의 스토리가 그곳에 시작할지도 모른다. 시종일관 거리를 걸어가는 영화에서 카메라는 유달리 수평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고, 1991년 이미 20년이나 지나버린 세월을 감안해도, 키타노 타케시의 평행을 유지하는, 수평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앵글은  그 여름, 그 거리의 기억을 온전히 남겨두려는 괜한 애씀, 소리를 지운  여름의 화법이기도 하다. 무수히 평범한 하루가  스쳐가는 사이, 우리는 바다가 아닌 너를 보고, 너가 아닌 바다 곁의 누군가를 바라보고, 그렇게 가장 조용한 여름을 간직한다. 가장 수선스러운 계절, 여름. 타케시는 가장 내밀했던 너와 나의 한 나절을 이야기한다.

여름이 끝난 뒤 알아차리는 뒷북의 계절이라면, 여름을 담은 영화들은 인생을 은유하는 깨우침의 메타포를 남기고 간다. 한 편의 시와 같은 기타노 타케시의 '그 여름 가장 조용했던 바다'에서 '깨우침'같이 재미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건 여름을 무시한 발상같기도 하지만, 모든 게 조금씩 선명해지는 계절, 여름에 말 한 마디 주고받지 않는 남녀 한 쌍의 러브 스토리를 꺼내든 키타노 타케시야말로 여름에 가장 도발적이고 저항하고 있다. 쇼난 해안에 구릿빛 서퍼들도, 맥주를 주고받으며 고함을 질러대는 여름밤의 들썩임도 이 영화엔 보이지 않는다. 타케시는 그저 그 여름밤에 숨어있던 너와 나의 외로움을 슬며시 꺼내어 나란히 앉혀놓는다. 가장 짙은 농도의 하늘일 것 같은 여름 날, 비어진 맥주잔에 남은 거품, 그 외로움의 자리는 조금 더 빛이 나고, 불발된 장난, 잠깐의 오해, 없는 돈에 보드까지 샀지만 실수로 파도 한 번 타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까지도, 별 일 아니게 여름의 한조각이 되어 지나간다. 미야케 쇼타가 새벽녘에야 알아차린 여름 끝무렵의 처연함을 타케시는 바다의 수평선으로, 이시이 유야가 2시간을 질주하며 갈구했던 우울의 종착점을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는 보드 위에 붙인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대신한다. 영화의 결말, 스포일러(1991년 영화지만)가 될지 모를 장면에서 조차 타케시는 그저 짙은 안개 속을 둘이 아닌 혼자, 홀로걷는 시게루와 타카코를 바라보고만 있다. 작은 틈새, 금이 생겨버린 이별이 잠시 그곳에 찾아왔다 지나갔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다.

영화의 초반, 역시나 20년이나 지난 영화라 생겨버린 생경함일진 몰라도, 처음으로 해변에 나서는 시게루와 타카코에게 '조심해'라고 말하는 이웃 주민의 장면은 좀 어색해서 의미 심장하다. 허리 위로 치켜잆은 추리닝에 과연 운동이 될까 싶은 체조를 하면서 중년 남자는 보드를 옆구리에 낀 시게루에게 '데이트? 조심해'라 말한다. 서핑 스폿이 있는 마을에서, 보드를 들고있는 이에게 으레 건네는 한 마디이지만, 여름엔 왜인지 모든 게 의미를 갖고 찾아오는 듯한 몽연함이 있다. 결국 이 말은 엔딩을 암시하는 일종의 복선이 되지만, 그저 동네 심심한 아저씨의 한마디는 멋있지도 않고, 중요해 보이지도 않고, 암시니, 복선이니, 애초 그런 거창한 의도따윈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느새 찾아와 어느덧 떠나가리는 여름은 기억으로 남아, 이렇게 뒤늦게 도착하는 메시지는 그 날 내게 다가왔던 여름의 장면인지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서 가장 심심하다 느끼는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배다른 자매의 애뜻한 재회, 그리고 동거를 그려냈던 것 역시 여름날에서였고, 그 영화엔 여름에 발견하는 무수한 '지나감'의 흔적이 있다. 키를 재며 집 기둥에 적어놓은 서로의 이름들, 수 년 전 담가놓은 매실, 집을 나간 엄마는 왜 하필 그 여름에 돌아오고, 세상을 뜬 아빠는 모르던 여동생을 남겨놓았다. 

어쩌면 여름은 이런 돌아봄을 위한 계절일까. 가을을 목전에 두고 화들짝 놀라고 마는 건 그런 연유에서일까. 태풍이 예고되어 있는 월요일. 여름은 얼마 남지 않았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후 고레에다가 찍은 영화는 '태풍이 지나가고'다. 

by ABYSS | 2020/08/24 16:06 | Cultur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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