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의 계절, 타임 투 타임


"인간의 불가피한 운명 중의 하나는, 남과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신이 집단생활, 공동체적 삶을 싫어하건 좋아하건 상관없다.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공존'하지 않고서는 삶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타인과의 공존은, 운명이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中

오래 전에 사두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어제야 넘겼다. 본래 읽는 것도, 쓰는 것도(언제부터인가) 빠르지 못한 사람이라 한 권의 세월이 내겐 유독 길곤 하는데, 몇 번의 거센 비와 끝나버린 듯 싶던 여름 햇살이 내리쬐는 오늘, 조금은 시절 탓이라 변명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지난 해 9월 시작한 책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쳐 어느새 1년을 기다리고, 어제는 편집자에게 교정 작업이 끝나고 디자인 작업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리고 타이틀과 관련해 짤막한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관계 끝의 불매운동, 갑작스레 들이닥친 코로나, 왜인지 두 번이나 바뀌어버린 편집자. 처음 책 제안을 받았을 때, 난 정리되지 않은 실패들에 여전히 허우적대고 있었고, 기쁨이 기쁨인지 몰랐고, 얼마나 좋아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조금은 좋은 일이 내게도 시작되고 있었다. 별 일이 없다면, 또 한 번의 돌연 변수가 생기지만 않는다면, 책은 9월에 세상에 나온다.

도쿄를 좋아하지만 그곳에 살고있지 않고, 카페나 레스토랑, 힙한 플레이스라면 나보다 파삭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겠지만, 지난 5월 난 그곳을 기록하고 싶었다. 매일같이 보던 트위터에서, 야후 재팬 1면에서 보던 뉴스들이 작은 방 안에 고여있던 나를 들쑤시고 부추겼다. 38년 전통의 책방이 문을 닫고, 시모키타자와 상점가엔 '78년간 감사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붙고, 돌연 문을 닫았던 시부야 파르코는 허망하기만 했는데 반년이 지나 공사 현장을 담은 포스터는 그곳의 내일을 예고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연호도 바뀌어 새로 시작하는 시대의 초입. 38년의 역사가 사라진 자리엔 입장료를 받는 책방이 문을 열어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장인의 나라, 노포가 일상인 그곳에 저물어가는 시간이, 아마 내가 아는 도쿄라 느꼈는지 모른다. 문을 닫고 흘러가는 시대의 마지막에 어쩌면 '도쿄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도쿄를 통해, 도쿄의 시간을 통해, '시간'이라는, 오묘하고 깊숙한, 세월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자신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난 밤, 메일로 전달받은 타이틀 가안을 보고 새삼 잊고있던 그 때를 생각했다.

유튜브를 켜고 지난 주말 WWWX에서 열린 미츠메의 공연을 보았다. 그들의 3월 공연이 발표되었을 때, 난 출판된 책을 들고 만났던 장인들을 다시 한 번 만나 책을 건네고 미츠메의 공연을 보러 갈, 나름의 깨알같은 계획을 짜기도 했지만, 좀처럼 끝나지 않는 흉흉한 계절 속에 출판도, 공연도 미뤄지고 미츠메의 'autumn camp'는 결국 내게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떨리듯 들려오는 카와베 모토의 목소리, 마스크를 쓴 채 조금의 미동도 없는 관객들의 정적. 새로 발표된 '토닉 러브'를 부르며 그들은 잠깐의 프리즈를 거쳐 끝나버린 음악을 다시 연주하는데...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놓쳐버린 계절의 빈자리가 싸늘했다. 만나지 못해 알게되는 만남, 함께있지 못해 함께하는 순간, 실패해서 완성되기도 하는 계절. 'ghotst' 앨범을 소개하며 카와베 모토가 아쿠카타와 류노스케의 '조춘'을 이야기할 때, 그 말들 속의 시간. 편집자가 전해준 메일 속 제목은 어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지만, 밤잠을 설치고, 하루밤을 묵히고 보니 그건 지난 해 내가 생각하던 말들이었고, 타인의 시간 속에 남아있는 나의 어제가 새삼 다행이라 생각했다. 남과의 공존이라는 건, 곧 나와 다른 시간들과의 협력. 수많은 '하지 못함'의 나날에서 '할 수있는 것들'을, 젖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img_浜田秀明

by ABYSS | 2020/09/08 17:53 | Ein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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