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静かに朝は
by ABYSS
나는 나의 바다를 보지 못한다. '비치'

극장을 잃은 요즘, 영화가 문을 여는 자리를 서성인다. 마루에 앉아 하릴없이 TV의 채널을 돌리는 시간이 그렇고, 영화관 예매 사이트를 기웃대며 불안함에 결국 결제는 하지 못하는 예매의 흔적들이 그렇고, 이제는 종류도 많아져 선택에 모자람은 느끼지 않지만 어김없이 나의 작은 14인치 노트북에 상영될 유튜브, 넷플릭스, 기타 OTT 속 영화들이 그렇다. 새삼 새로운 일들도 아닐텐데, 무언가를 잃은 후 느껴지는 이 생경함이란. 나와 그곳 사이에 놓여있는 아직은 좀 익숙치 않은 일상이 나는 아직 좀 생소하기만 하다. 매일 밤 하루를 정리하며 들춰본 수첩엔 이런저런 영화들의 타이틀이 적혀있고, 왜인지 오래 전, 이미 흘러간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는 날들이 어쩌다 내게 다가왔다. 이창동의 '버닝'을 다시 본 다음 날, 대니 보일의 20년 전 영화 '비치'와 2시간 남짓을 보냈고, '찜'을 해둔 폴란스키의 68년작 '악마의 씨'가 '언젠가의 만남'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돌연 시계를 거꾸로 돌린 듯한 나와 영화 사이의 이야기. 집에서 보는 영화엔 내 시간의 계절을 돌아보게 하는, 이상한 '플래쉬백'이 작동한다.

2000년에 개봉한 '비치'라고 하면, 내겐 대니 보일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비치'로 남아있다. '타이타닉'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할리우드 젊은 배우가 탄탄하고 안정적인 '쉬운 길'이 아닌, 90년대 젊음과 자유, 그리고 반항의 총아라고 불리던 대니 보일과 굳이 손을 잡았던 영화. 스무해나 지난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당시 그 영화는 별 좋은 반응을 받지 못했다. 비평도 장사도 모두가 우려했던 그대로. 그런데 디카프리오는 왜 당시, 그런 선택을 했던걸까. 역대 최대 흥행 스코어를 경신하며, 오스카까지 휩쓸었던 '타이타닉' 이후 왜 그는 영국의 실험하는 인디 감독의 작품을 골랐을까. 세상은 종종 보이는 현실이 아닌 마음 속 길을 따라걷고, 그렇게 사람을 닮아있다. "세상엔 누가 뭐라고 해도 가야하는 길이 있고, 다시 돌아가야 할 이유도 그만큼 있다." 자비에 돌란은 2017년 영화 '단지 세상 끝에서'에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비치'의 첫 장면, 어딜봐도 애송이 대학생 청년 리차드는 그 무렵 누구나 꿈꾸는 배낭 여행을 준비하며 자못 의미심장하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의 이름은 리처드." 그는 어쩌면 영화의 문을 열고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던 걸까. 좀 유치하지만, '트래인스포틴'에서 이완 맥거리거의 대사는 '인생을 선택하라'. 영화엔 왜인지 이런 문턱의 순간들이 있고, 세상 모든 수상함은 '사람'으로 설명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비치'는 치기어린 젊은 날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영화다. 여행, 사랑, 도전, 모험. 그리고 그게 전부인 영화이기도 하다. 크게는 미지의 여행을 떠나며 벌어지는 모험극에 가깝지만, '성장'이라는 아마도 가장 진부할, 그리고 유치한 서사를 위해 온갖 산전수전을 감내하는 허세 가득, 중2스러운 영화이기도 하다. 애초 이이야기의 발단은 유명 관광지 태국에서 자신만의 여행을 하겠다는 리처드의 호언장담이었고, 1년 365일 태양이 작열하고 술과 마약에 젖어 현실이 휘청대는 '태국'이란 배경은 그 나이, 그 무렵, 그 치기에 제법 어울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모험극이 눈에 보이는 하나의 '성취'를 향해 움직인다면, '비치'는 온전히 리차드의 내면, 그가 느끼고 반응하고 생각하는 몸덩이 하나에서 시작한다. 그만큼 단순하고 진실하다. 일면 '인디아나 존스'의 열차를 탄 '트레인스포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리차드는 여행의 시작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지도를 꺼내지 않는다. 줄곧 리차드의 나레이션으로 흘러가는 영화에서 이정표라면 그의 목소리가 유일하다. 리차드는 사랑을 고백하지 못할 정도로 용기도 없고, 때때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도 하지만, 그렇게 서툴고 실패하며 자신에게 걸어간다. 대부분의 모험극이 '영웅'을 배출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에 그런 영웅 서사는 없고, 사람의 어느 계절 속을 탐험하던 여정의 조금 아픈 진통이 남아있을 뿐이다.

사실 '비치'가 개봉할 당시 영화는 좀 시끄러웠다. 촬영장 확보를 위한 공사로 가장 아름다운 섬 중 하나로 꼽히는 섬 피피를 훼손해 소송에 휘말렸고, 점점 '치기'보다는 '스타일'로 종주하는 대니 보일에 대한 쓴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결국은 '파랑새' 서사의 변주일 뿐인데 4천 만 달러가 넘는 제작비는 좀 많이 허황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엔 시간과 함께 더해지는 감정이 있고, 돌아봤을 때 보이는 풍경이 있고, 그렇게 새로 쓰여지는 '어제'의 스토리가 있다. 리차드는 겨우 스물을 갓 남긴 청춘이지만 그의 어설픈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서른을 훌쩍 넘긴 내게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비치'는 우리 모두가 조금은 허세로 살았던 어느 성장통의 무렵을 돌아보게 한다.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어김없이 나이고 너였던 시간들. 영화는 세월과 함께 다시 쓰여지는 무엇이기도 하다. '비치'는 본래 알렉스 갈란드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었다. 하지만 갈란드가 소설을 쓴 건 태국이 아닌 필리핀에 거주하던 시절이었고, 그의 데뷔작인 이 작품을 닉 혼비는 'X세대의 '파리 대왕'이라 평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떤 세대, 시절의 시작점, 혹은 출입문 그리고 트랜스포팅. 대니 보일은 리차드의 무모한 탐험을 통해 '혼자'라는 그림 곁에 인간 본성, 그리고 '비밀'로 유지되는 희미한 희망을 덕지덕지 그려내며 욕심을 부리지만, 사실 나란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조금은 허황된 모험극이 되어버렸던 걸까. 영화에 흘러가는 '이 바다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아'라는 말. 어쩌면 여기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한, 그리고 만나지 못한. 내 안에 있는 무언가. 그런 갈망. 그 시절 그들은 그곳을 보지 못했고, 나는 나의 바다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바다는, 바다를 갈망한다.


by ABYSS | 2020/12/24 13:04 | Cultur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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