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밝고 '나쁜 계기'에 관하여


기사를 준비하며 자료를 훑다보면 가끔 물컹해질 때가 있다. 지난 도쿄의 장인들 중 콜라 장인 코바야시 히데타카의 글 중 돌연 비어있는 그의 아빠와의 자리가 보였을 때, '백엔의 사랑'을 만든 타케 마사하루가 영화에 매달렸던 질펀한 시간이 꼭 영화의 이야기가 아니었을 때, 나는 마음이 흔들린다. 쓰여지지 않은 말들에, 이야기되지 않은 시간에 깊숙이 이입해버린다. 쿠마 켄고에 대해서는 아오야마의 '네즈 미술관' 정도를 빼면 사실 아는 게 별로 없었는데, 그의 건축, 도쿄, 도시를 알자고 시작한 일은 이상하게 '사람 쿠마 켄고'를 알아가는 일이 되어버렸다. 세상 어떤 일은 애초 시작된 타이밍이나 의도, 출처와 상관없이 내게 다가오며 의미를 갖는 것들이 있고, 코로나 시대에 쿠마 켄고는 아마 가장 준비된 내일인지 모른다. 최소한 나에게는, 세상을 좀처럼 곧이곧대로 보지못하는 나같은 삐딱선의 인간에게는. 쿠마는 스스로를 '늘 비틀어보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멋대로의 착각이지만 그는 사실 나와 조금 닮았고, 어차피 착각이지만 내가 걸어온 시간은 대부분 착각의 힘이었다. 일이 곧 삶이 되어버린 사람, 삶이 일이 되어 버틸 수 있었던 사람. 쿠마의 건축은 '지어지지 않는 것'의 자리를 살피고, 그건 늘 '실패'에서 시작한다.  

쿠마 켄고는 사실 지금 도쿄(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바쁜 건축가인지라, 그럴 때 준비 작업이란 무얼 보고 무얼 패스할지의 연속이라, 내가 그의 그 대담 영상에 클릭을 한 건 어쩌면 하나의 별볼일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자동차 브랜드 '렉서스'가 교토에서 주최한 '일본의 和', 크래프트맨십과 미의식에 관한 이야기. 사실 주제가 맞는 방향도 아니었는데, 그가 만든 격자식의 나무 창틀을 배경으로 쿠마와 대담자인 크리에이터 코하시 켄지의 이야기를 한참 들었다. 사실 둘의 관계라고 하면 비슷한 업계 종사자 사이의 대선배와 후배 정도일 뿐인데, 그래서 초딩과 선생님의 대화처럼도 들렸지만, 코하시 씨는 자꾸 쿠마와 자신의 접점을 찾으려했다. 그는 AR 기술로 불꽃놀이나 하는 이벤트 기획자일 뿐인데, 자꾸만 쿠마에게서 자신의 내일을 보려했다. 어떤 억지스러움, 그리고 어리석음.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싶을 대 가장 유효한 건 그와 나의 공통점, 혹은 착각이고, 내일에 대한 조언이 빛을 발하는 건 나에게 적용 가능한가의 지점에서이다. 이야기 중반 쯤 코하시 씨는 오래 전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는 잊고잇던 나의 어제가 떠올랐고, 쿠마 씨는 아마 20여 년 전 오른팔을 쓰지 못하게 했던 사고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세상 모든 상처는 상처를 알아보는 어떤 '감'을 갖고 자란다. 

"변화는 계기에서 시작돼요. 그리고 그건 꼭 '나쁜' 계기더라고요. 좋은 계기에선 좀처럼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죠." -쿠마 켄고

by ABYSS | 2021/02/16 18:06 | Ein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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