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와 너의 나와 나의 너의 이야기-쿠마와 나라와 사카모토를 경유해

남의 이야기를 하며 빛나는 글이 있다. 비평, 리뷰, 혹은 논평같은 것들은 '남'의 이야기를 하고있는 듯 싶지만 여지없이 반응하는 나로서의 이야기이고, 묘한 거리감의, 내가 남이 되려할 때의 벌어지는 일종의 작용・반작용은 애초 2인칭으로 태어나는 글의 원형이다. 글의 내연과 외연이 뒤엉키는,  문장이 갖고있는 보이지 않는 갈등의, 내 안의 너를 향해 내뱉는 말. 나는 종종 그걸 가장 외로운 독백이라 생각하고, 잠이 오지 않던 새벽, 사카구치 안고의 글(낭독)을 들으며, 그는 지금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있는 것 같았다. 그가 1940년 문예지 '문예 정보'에 실었던 '문자와 속력과 문학(文字と速力と文学)'과 다음 해 '현대문학'게 게재된 '문학의 고향(文学のふるさと). 절친한 작가 나가시마 아츠무를 떠나 보내고, 절대적 고독의 시기라 불리던 때 써내려간 글이라 하고, 두 작품은 묘하게 서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정한다. 소설가가 되고 20여 년이나 지나 문학의 자리를 발견하는 '생각의 여로'와, 삶이 되지 못하는 문학으로서의 운명을 슬며시 적었다, 다시 지워내는 자조의 제스쳐. 그의 본래 이름은 사카구치 헤이고柄五이고, 말 안듣는 중학생 그에게 가정 교사가 '안고暗吾'란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후 '단가'를 쓰기 시작하며 그는 한자를 바꾸어 '안고安吾'로 나머지 생을 살았다. 문자와 이름과 삶과 그리고 문학과. 알고도 뒤로 내빼는 포기의 글쓰기와 내게서 너를 보려고하는 아둔한 문장들. 새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카구치 안고가 '글'의 불가능, 생각을 문자로 옮기는, 소위 글쓰기란 행위의 한계를 자각한 건 평소 쓰고있던 안경이 고장나면서다. 좀처럼 써지지 않는 문장 하나의 숨겨진 이유, 비밀을 그는 '부자유'에서 발견한다. 그저 저하된 시력으로 생겨난 일이었을 뿐일텐데, 사카구치는 '글쓰기', 그 자체의 난점을 헤집는다. "내 머리에는 다채로운 상념이 떠오르고, 구성되고, 그건 이미 머리 속에서 문장의 형태로 갖춰진다. (그러면) 나는 책상으로 향한다. 그저 쓸 기재가 있으면 상념은 무리없이 종이 위 문장이 되어 재현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간단하게 옮겨주지 않는다." 나를 포함 대부분의 마감 노동자들은 오늘도 잘 풀리지 않는 글을 끌어안고, 빈약한 어휘력, 부족한 문장 탓만 하고 있겠지만, 사실 그건 내가 아닌 문장과 생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시차', 타고난 고질적 '비효율'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사카구치는 '상념'의 속도를 '문자'는 쫓아가지 못한다고 적었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일화까지 예로 들어가며. 알려진 건 빚에 시달리느라, 마감에 맞추기 위해서 도스트에프스키가 속기사를 고용했다고 되어있지만, 실은 자신의 '상념'을 그대로, 정체되거나 망설이는 것 없이, 생기를 잃지않고 '문자'로 옮기기 위해서였다는 게, 사카구치의 정설이다. 도스트에프스키는 끝내 속기사와 결혼을 했다. 나는 요즘 원고에 대해 '추상적', '모호함', '어렵다'는 평을 종종 듣는데, 당신의 시간은 몇 시입니까. 고료를 받기위해, 또 하나의 원고를 청탁받기 위해, 나는 그저 오늘도 당신이 되어본다. 

데이비드 핀쳐가 오즌 웰스의 '시민 케인', 그 명작의 메이킹 스토리를 그대로 영화화한 '맹크'에도 '속기'의 장면이 여러번 등장한다. 여기에선 회심의 작품을 앞둔 맹키위츠가 불의의 사고로 부상을 입은 탓에 침대에 누워 속기사로 고용된 리타에게 문장을 읊고있을 뿐이지만, 작가의 몸이 아닌 혹은 타자기거나 키보드가 아닌 입으로 발화된 말들이 타인의 귀를 통해, 그리고 두뇌와 몸의 작용으로 문자화되어가는 과정이 새삼 이질적이라 생각했다. 비슷한 작업이라면 기자 시절, 혹은 취재를 한 뒤 녹취를 푸는 지난한 작업이 그에 해당될텐데, 기사를 위해 옮겨놓은 취재원의 말들은 여지없이 윤색되고, 생략되고, 말하자면 편집이 된다. 물론 그들은 글을 쓴 게 아니지만, 새삼 말은 글로 온전히 옮겨질 수 있을까. 사카구치 안고의 '상념'을 빌리면 나의 손은 나의 머리를 배반하지 않을까. 머리가 하는 일과 몸이 하는 일. 혹은 생각은 돈이 되지 않지만 글은 돈이 되는 현실.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실패의 행위'이고, 글이 되기 위해 지워지는 상념이 있다. 사카구치의 '문학의 고향'에서 '고향'은 문학이 태어난 곳임과 동시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인간 너머의 세계를 가리키고, 우린 결국 그곳에 갈 수 없어 문학을 읽고, 글을 쓴다. 좀처럼 시작을 찾을 수 없는 어떤 뫼비우스의 길. 너무 많이 걸어온 게 그저 탈일 뿐이다.  

by ABYSS | 2021/02/20 13:26 | Ein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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