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3월 05일
너가 되기 위한 조건, 어느 죽음에 고해

지난 밤 내가 늦은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운 시간 나보다 다섯 살이 어린 일본의 아티스트 sirup은 두 번쨰 ep를 발매했다. 트랜스 젠더 육군 하사가, 내게는 꿈에서도 찾지 못할 용기로 국민을 향해 호소했던 외침이 무참히 살해당했던 밤, sirup의 새 앨범 타이틀은 cure, 선공개된 싱글은 'thinkin about us'였다. 서로 다른 자리의, 아무런 관계도 없는 두 가지의 사건과 사고. 하지만 오직 나를 경유했던 그 시간의 보이지 않던 이어짐의 재생. 나보다 다섯이나 어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노래 공개와 함께 남긴 몇 자의 글이 꼭 나와 우리에게 하는 말인 것만 같았다. "세상은 지금 추상적(긍적적)인 말들로 흘러넘치지만, 그런 말들만 존재하는 세상은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겠지만, '보통'과 조금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입지 않을까요. 진심으로 사람과 마주하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깊이 고민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의미를 이룰 날이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그런 thinking about us, 그리고 cure. 세상의 위로가 내 것이 아닌 건 그곳에 내가 지워져있기 때문이고, 세상 모든 듣기 좋은 말이 허울처럼 느껴지는 건 그들이 말하는 건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우리'는 왜 하필 나와 너의 '우리'와는 다르다. 언제쯤 '끼리끼리'의 민족은 내가 아닌 너를 바라볼 수 있을까. '우리'라 함은 TV 앞에 앉아 자유롭게 뉴스를 볼 수 있는 사이이고, 동등하게 다툴 수 있는 관계이며, 어떻게 화해를 해야할지 맘을 졸이는 늦은 새벽같은 것이다. 내가 없으면 당신의 '우리'는 성립하지 않아요.

근래(라고는 해도 이미 오래 전부터) 뒤적이고 있는 하타노 히로시의 에세이 '왜 내게 물어올까'라는 묘한 인생 상담 수록집엔 다양, 다채로운 삶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현실극이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암 선고를 받은 사진가가 왜인지 돌연 밀려드는 트위터 DM 인생 상담에 답을 하기 시작하며 만들어진 한 권인데, 보는 내내 몇 번이나 눈실울을 적셨다(이렇게 고리타분한 표현이 또 있을까 싶지만 그만큼 이 책은 그 고리타분의 정서를 건드린다). 일본과 한국이란 나라의 정서적 차이가 없지는 않겠지만, '내가 아닌 너'는 그야말로 힘든, 고되고 괴롭다 못해 몇 번이나 죽고싶어질 만큼의 삶을 살고있고, 여생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40대의 한 남자 사진가는 '그 자리, 그 시간, 그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을 담담하게 건네준다. 때로는 차갑게 하지만 진심으로, 어찌보면 독하게 그러나 맞는 말인 것 같은. 그런 조언 아닌 조언이 수 십 명치 실려있다. 이 책은 트위터에서 시작돼 cakes라는 블로그 사이트에서 연재를 진행했고, 1천만이 읽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화제를 모은 '너와 나'의 대화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여기엔 여느 힐링 서적, 조언을 건네는 둥 싶지만 자기자랑으로 도색되어 있는 책들과 달리 내가 아닌 '너'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고, 그렇게 잠시 나를 포기하는 순간의 '애절함'이 묻어있다. 하타노 씨는 이 생뚱맞은, 남의 애기나 들어주는 인생 상담자 역할에 대해 '우리 아들이 해온 상담이라 생각하고 답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다음을 위한 말들. 오늘 아침 페이스북에 오랜 페친(이지만 딱 한 번 만나본) 영화 감독이 올렸던 미얀마 데모 행렬에서 쏟아진 '성소수자들은 대부분 아이가 없지만, 우린 다음을 위해 싸운다'는 외침. 내가 아닌 너, 너가 아닌 나는 오늘도 얼마나 너(나)의 곁을 지나쳤을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려한다.
*가장 위 사진 ©️eikimori
# by | 2021/03/05 16:11 | Publicité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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