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가 '우물'에서 깨어난 날, '인트로덕션' -홍상수 영화의, 어쩌면 '창세기'

세상 모든 영화는 하나의 ‘시작'을 암시하는 '오프닝'이라 생각하지만, 홍상수의 25번째 영화는 제목이 ‘인트로덕션'이다. 우리 말로 옮겨보면 시작이거나 도입, 혹은 입문이거나 첫 번째 챕터.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번 영화의 제목은 어떻게도 영문인 ‘인트로덕션'이 되어야 한다는 감각이 있다고 이야기했고(심지어 예고편 오프닝이 그 설명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그 다운, 모호하고, 심층적인 이 뉘앙스의 이야기는 그의 ‘인트로덕션'이 우리가 쉽사리 생각하는 여타 ‘시작'들과 (기본적으로) 다름을 ‘선언'하고 있다. 오로지 이곳에만 존재하는, 어쩌면 그조차 아닐지도 모르는. 홍상수 영화에서 제목이 언제 한 번 단순한 타이틀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 역시 스스로 ‘강조'를 했듯 ‘인트로덕션'은 ‘시작', ‘도입'이 아니고, 우리는 왜 다시 새삼 (그의) 영화 앞에서 (세계의) 시작을 망설이고 있다. 스물 네 편의 영화를 지나,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인트로덕션.’ 홍상수는 왜 다시 ‘시작'의 문턱에 있을까. 난 언젠가부터 그의 영화가 ‘다시 돌아오기 위한' 귀로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인트로덕션', 그래서 영화의 도입,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말하면 이야기는 한 남자의 ‘좌절'에서 시작한다. 흑백 화면에 불이 꺼진 방에서 남자는 두 손을 꼭 쥐고 영문 모를 다짐을 반복하고, 커다란 실패에서 일어난 듯한 ‘절대적인 말'들은 어딘가 홍상수의 전작 ‘그 후'의 봉완(권해요)을 떠올리게 한다. 혼자만의, 세상 모든 고뇌를 짊어진 듯 무거운 걸음으로 집을 나와 지하철 계단을 걷던 새벽의 한 남자. 마지막이 암시되어 있던 ‘그 후' 이전의 어느 밤. 조금 더 풀어보면 홍상수 영화에서 몇 번의 죽음을 거쳐(<생활의 발견>과 <극장전>), 시점과 시차의 미로를 지나(<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클레어의 카메라>) 경수나 동수, 완수가 아닌 민희거나 만희, 영희로 아름다움, 사랑, ‘예쁜 것’들을 배회하던 홍상수 영화의 어떤 원점으로서의 장면(영화).

단순히 말하면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여자'의 품에서 보이지 않던, 찾아지지 않았던 어떤 ‘진리'를 마주하고, 다시 ‘남자'의 ‘현실'로 돌아온 홍상수 이후 다시 홍상수. 그러니까 앵글의 전환이거나 시점의 불가해한 확장. 영화는 주인공 영호(신석호)가 아빠, 여자 친구, 그리고 엄마를 찾아가는 여정을 따라가며 모두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난 이게 고대 그리스 비극 3부작과 같이 홍상수의, 다시 시작하는 '완성’이라 생각했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66분, 3막 곱하기 22분...?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더 정교하게 짜여진, 어떤 ‘원형'으로서의 자연’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인트로덕션'은 매우 가볍게 느껴지지만 웅장하다. 전작을 아우르지만 배반하고 있고, 어떤 ‘시작’이지만 마지막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 ‘인트로덕션'이 단순히 시작, 도입, 입문이 아니듯 이 영화의 ‘시작'엔 어쩔 수 없이 어떤 ‘마지막'이 내포되어 있다. 시작과 함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남자는 무엇이 그렇게 고뇌이고 무엇이 그렇게 간절한지. 나는 그의 전작의 엔딩, 아니 그의 영화에서 한동안 뒷막으로 사라졌던 홍상수의 남자들을 떠올려 볼 수 밖에 없었다. 민희와 같은 자리에서 영화, 아니 ‘파도'를 바라보고 있던 한 외국인 남자(‘도망친 여자’). 잠시 스쳐간 ‘말 많은' 정선생(권해요)이거나, 시 한편을 남겨놓고 너머로 떠나간 ‘강변 호텔'에서의 영환(기주봉).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늘 실패의 문턱에서 좌절하던 경수이거나, 봉완의 ‘그 후.’

영화는 영호를 비롯 그의 엄마이거나 아빠, 여자 친구이거나 친구, 그리고 오래 전부터 알고있던 병원의 간호사와의 ‘대사'로 흘러가지만, 그 중심엔 한 명의 남자, ‘영호'가 있고, 단순하고 유치해져 버릴 위험을 각오하고 이야기하면, ‘인트로덕션'은 홍상수가 김민희(여자)가 아닌, 또 한 명의 ‘남자' 곁에서 다시 한 번 ‘삶’을 비관하고, 또 하나의 ‘실패', ‘유예된 희망’을 발견하는 영화인지 모른다. ‘잘 할 수 있을까요?’, ‘잘 할 수 있을거야.’ 영화는 이 대사를 몇 차례나, 마치 주문처럼 반복하는데, 난 홍상수의 이 25번째 영화가 어쩌면 기도의 ‘서문'처럼 쓰여졌다고 생각했다. 홍상수 영화에서 ‘다짐'은, 곧 ‘시작의 발견'이곤 했다.

몇 번의 ‘김민희'를 거쳐 다시 ‘영호’로 돌아온 ‘인트로덕션'엔 묘하게 ‘다인칭의 시점’이 어른거린다. 홍상수 영화에서 ‘주인공'이란 애초 여타 영화들의 그것과 성격이 달랐지만, 모두 세 막으로 흘러가는 이 영화에서 인물은 중첩되고 초점은 조금씩 각도를 바꾸고 영호를 포함 모든 인물(오직 김민희를 제외하고. 어느 순간부터 홍상수 영화에서 ‘김민희'는 하나의 시작이자 마지막이 되어있다)의 ‘드라마'는, 각자의 세계에서 움직인다. 가령 유학을 결정한 영호의 여자친구 주원이 엄마와 함께 독일을 찾았을 때 영호는 어디까지나 ‘그 이야기'에 방문하는 ‘타자'에 가깝다. 외지에서의 홀로서기가 불안하고 두려운 주원의 ‘고독'이 유일하게 여기선 ‘고뇌'이고 동시에 ‘과제'이다.

지금껏 홍상수의 영화가 고뇌하고 방황하는 주인공의 소위 ‘고군분투'를 그렸다면, ‘인트로덕션'엔 그에 반응하는, 동시에 상호 작용하는 ‘중첩된 세계'와의 ‘시작'이 꿈틀댄다. 무엇보다 ‘인트로덕션'의 인물들은 나무를, 바다를, 파도를 혼자가 아닌 ‘함께' 바라본다. 그리고 난 이게 홍상수 영화에 잠재되어 있던 ‘발견', 그 ‘성취'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풀잎들'에서의 ‘이어짐.’ 그러니까 김민희는 왜 이 영화에서 ‘물러나있는가.’

‘인트로덕션'은 서울과 독일, 강원도 양양을 지나고, 세 번의 만남을 경유하고, 모두 세 번의 ‘포옹’으로 마무리된다. '잘 될거야.’ 잘 할 수 있을거야.’ 우리가 알던 홍상수 영화의 ‘다짐'은 여기서 다시 등장해 서로가 서로에 품을 내어준 순간, 홍상수는 ‘가장 가까운 진실'을 찾았는지 모른다.

‘편하고 가볍고 느슨하게 흘러가다 웅장하게 몰아치는 파도.' 상영 시간은 66분에 별 일 없는 이야기가 별 일 없이 흘러가는 듯한 홍상수의 ‘인트로덕션'은 흡사 그의 또 하나의 소품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사실 첫번째 도입(인트로덕션), 1막부터 심상치 않다. 영호의 아빠 동현이 운영하는 한의원에서 시작하고 마무리되는 1막엔 아마도 가장 초연한, 투명하고 가벼운, 마치 아직 깨어나지 않은 ‘기도'와 같은 장면들이 이어진다. 말하자면 우연히 찾아온 환자이자 연극 배우 기주봉과 함께 차를 마시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그 ‘다음 장면.’ 두 남자는 자리를 뜨고 테이블 위엔 마시고 남은 빈 종이컵 만이 남는데, 영화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비어있음'을 한동안 바라본다. 보이지 않지만 지나간 (시간의) 흔적. 기주봉은 동현에게 ‘신과 같은 분이에요. 몸도 마음도 고쳐주시는데’라고 이야기 했는데, 설마 우리가 본 건 실재하는 것일까, 혹은 아닐까.

크지 않은 한의원에서의 이모저모가 전부인 1막이지만, 여기엔 묘하게 여기와 저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기도를 올리는 이편과 저편의 경계가 흐려지는, 혹은 무화되는 순간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간다. 가령 침을 맞던 기주봉이 의사 선생님을 찾을 때, 그는 보이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온 간호사는 ‘선생님 2층에 계세요'라고 말한다. 이곳이 아닌 2층, 커튼 너머 목소리만 들려오던 기주봉의 ‘실재.’ ‘도망친 여자'에서 감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영순의 2층을 떠올렸다면, 오해(버)일까. 전작 ‘도망친 여자'에서 ‘대화'를 동해 ‘진실'에 다가갔던 것처럼, 영원하지 않지만 절대적인 것에 대한 애달픔이, 이 영화엔 있다. 기주봉과의 대화 이후 동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밖에는 눈이 내린다. 홍상수는 끝내 ‘이곳에' 도착했(을지 모른)다.

별 일 없는 이야기가 별 일 없이 흘러간다고 적었지만, ‘인트로덕션'엔 어느 ‘시작' 무렵의 ‘사건'이 세 차례 연이어 등장한다. 그 ‘시작'은 무어라 설명이 되기도, 되지 않기도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 ‘무언가'가 시작에 서있다는, 애써 부여잡은 ‘의도적', 혹은 영화적 ‘시간'에 있다. 반복해 이야기하지만 ‘잘 될 거야'라는 이상한 다짐, 혹은 주문이 환기하는 것.

주원과 함께 아빠에게 가는 길에서 ‘잘 할 수 있을 거야'라는 주원의 응원이 무얼 가리키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과 간호사 예지원의 환대, 그리고 쌍화차 한 잔이 기다리고 있을 뿐. 하지만 뒤이어 2막에서 좀처럼 맘을 놓지 못하는 주원에게 엄마가 다시 한 번 그 말, “잘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이야기할 때, 그 별 거 아닌 말은 주원의 ‘유학'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절대적인 것, 삶 전반의 모든 것이거나, 첫 장면 동현이 간절히 기도했던 바람에 보다 가깝다. 만남은 왜 세 번 이뤄지는가. 포옹은 왜 세 번 찾아오는가.

홍상수 영화에서 ‘반복'의 모티브는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거나, 진실에 다가가는 열쇠와 같이 작용했지만, ‘인트로덕션'에서 그 ‘반복'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 잊혀지지만 남아있는 것, 작지만 절대적인 것을 향한다. 눈 내리는 1막의 엔딩. 영호와 지원은 함께 눈을 바라보고, 말을 나누고, 부둥켜 안고, 그곳엔 서로에게 남아있던 어떤 절대적 ‘기억'이 태어난다. ‘너 나 좋아했던 거 기억해?’, ‘아직도 그래.’ 이상한 ‘포옹'은 그렇게 갑작스레, 내리던 눈처럼 그곳에서 이뤄진다.

‘소개, 입문, 서문, (새것의 도입) 등', 어느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는 홍상수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의 제목 ‘인트로덕션'에 코멘트를 달기란 참 난감한 일이지만, 오직 세 번의 포옹 만으로 구성된 예고편엔 그나마 실마리가 될 만한 ‘말'들이 붙어있다. 정리해보면 각각 ‘한 사람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는 행위', ‘한 사람이 처음으로 뭔가를 경험하게 되는 것', ‘어떤것의 처음 부분.’ 그다지 도움이 되는 말들은 아니지만, 확실한 건 홍상수는 ‘인트로덕션'에서 하나의 선형의 시간을 ‘따르고' 있다. 말하자면 ‘인트로덕션'에 도달하기 까지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66분이기도 하다(그런 의미에서 가장 기승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홍상수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홍상수의 영화는 늘 어떤 ‘문턱'에 도달하기까지의 이야기이기도 했고(경주와 춘천을 맴돌아 도착한 경수의 ‘회전문', 선배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걸어 나오던 병원 밖 밤 거리에서의 ‘극장’의 안과 밖), 그런 맥락에서 ‘인트로덕션'은 방향의 전환이거나 ‘어느 시점의 시작', 자기를 부정하며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는 ‘완성된 시작'에 가깝다. 그리고 그건 ‘포옹(죽음이 아닌 삶, 부정 아닌 긍정)'을 동반하고 있다. 그러니까 동현의 시작(마지막)은 어떻게 영호의 마지막(시작)으로 이어지는가.

홍상수는 이 영화에서 자연을 바라보지만 ‘바라보는 행위를 지켜’본다. 이전 영화의 ‘남산 타워', 프랑스 칸 해변의 이국적 나무가 불러왔던 '예견된 실패'의 환기가 이 영화엔 없다. 독일 거리를 걸으며 그곳의 ‘이상하게 생긴 나무'는 주원과 그의 엄마의 대화 속에 존재하지만, 실재가 드러나는 건 한참이 지난 후에서이다. 마지막 3막 파도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엔 ‘바다'가 아닌 ‘바다를 바라보는 영호와 그의 친구’가 있을 뿐이다.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실재하는 것과 실재함을 느끼는 것. 아름다움, ‘실재'는 이곳에 없지만 그걸 느끼는 ‘나', 시간은 이곳에 존재하고, 홍상수는 어쩌면 ‘그런 시작'을 하려는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 영호와 친구가 멀리 떨어진 호텔의 엄마를 바라보는 대목에서, 그들이 본 건 엄마일까, 혹은 ‘엄마(여자)’라는 관념일까. 이 영화에서 ‘너와 나'의 ‘포옹'은 사실, 그보다 보다 더 광대하다.

홍상수 영화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최소한의 것들로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가 ‘전원사'란 회사를 차리고 보다 독립적으로, 영화, 그리고 그와 관련된 것들을 책임지려 의식했을 무렵 부터인데, 그건 영화 외적인 이야기지만 동시에 그에겐 영화 자체의 문제이기도 해, 영화와 삶, 삶과 영화에 대해 이만큼 고민하고 있는 작가를 본적이 없다. 현실 가장 너머를 바라보지만 어김없이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영화적 자성, 반성과 고뇌를 거듭하는 가장 비현실적이고 동시에 현실적인 영화들. ‘인트로덕션'의 3막에서, 이 영화중 유일하게 등장하는 술자리에서, 동시에 가장 많은 말이 오가는 장면에서 홍상수 영화의 ‘인장'과도 같은 ‘장광설'은 또 한 번 출현하는데, 1막 이후 사라졌던 기주봉의 입을 빌려 홍상수는 영화란 현실, 영화라는 비현실에 대해 가장 뜨겁게 말을 쏟아붓는다.

여자 친구가 맘에 걸려 키스 신을 하지 못하는 영호. 영화는 자꾸 현실이 되려 하고, 그렇게 ‘진실'은 도망을 가고, ‘잘 할 수 있을거야'란 다짐은 무색해져 ‘가짜 현실' 만이 흘러가는데, 영화는 무엇 위에 ‘이야기의 현실'을 쌓을 수 있을까. ‘연기'라는 거짓을 둘러쓰고 사랑을 말하고 삶을 논하는 영화는 그저 허황된 ‘허구'에 불과할까. 하지만 현실 속 키스와 영화 속 키스는 어느 게 더 ‘진짜'에 가까운지. 영화 속 ‘삶'과 현실의 ‘삶'은 어느 게 더 영화같고 덜 현실같은지. 애초 ‘영화다움'이란 무엇인지.

영화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자 홍상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한 이 장면은, 묘하게도 그간 홍상수 자신이 물어왔던 현실과 너머, ‘진실'을 자문하던 여정과 ‘이상한 만남'을 가진다. 말하자면 '세계의 외부'가 아닌 '나의 ‘내부’를 바라보는 ‘시점의 확장.’ 두 번의 ‘포옹' 이후 세 번째 포옹을 맞이하기 까지의 ‘문턱.' 그리고 영호의 엄마를 마치 하늘의 구름, 파도치는 바다, 길가의 나무처럼 응시하던 뭉클한 ‘돌아봄.’ 그곳엔 삶의 모순을 끌어안는 ‘긍정’이 있고, 파도에 몸을 부닥치는 ‘다짐의 긍정'이 있고, 그건 곧 기묘한 ‘시작의 긍정’이 된다. 파도치던 겨울 아침, 눈을 바라보는 너와 내가 있었다.


**극중 인물들의 이름이 정확하게 모두 공개되지 않은 탓에, 배우의 실제 이름과 역할 명이 혼용되어 있습니다.

by ABYSS | 2021/06/12 10:30 | Cultur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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