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배달의 속도로 살아갈 수 없다면

택배가 시끄럽다. 물건이 도착했다는 건 언젠가부터 초인종 벨이 아닌 핸드폰 메시지로 대체되었고, 어쩔 땐 그 조차 오지않아 도착했다는 물건을 찾아 한참 배회하기도 한다. 여기서 택배란, 홈쇼핑, 인터넷 쇼핑, 각종 비접촉의 ‘매장'을 거치지 않은 구매 행동 이후 나에게 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 비가시적 오고감 이후 박스에 응축된 너의 마지막이거나 나의 시작 이전, 그 모든 걸 총칭하는, 다소 작의적인, 그리고 보다 K적인 의미에서의 택배인데, 한국에서 택배는 좀 말못할 사연으로 뒤범벅된 ‘취급 불가 화물'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핸드폰 메시지에 현관 문을 열어보면 큼지막한 박스 두 세개는 문을 가로막듯 놓여있고, 난 그곳에서 보지 못한 사람의 어떤 ‘성급함'을 보고만다. 문을 수월히 열지 못하는 나의 ‘짜증'과 하나라도 더 많이, 빨리 배달해야 하는 너의 ‘바쁨.’ 이건 대체 누구의 장난인지. 원인과 결과로도, 좋고 나쁨으로도, 누가 잘했고 못했냐의 문제로도 결코 풀리지 않는, 애씀과 애달픔만 남아버리는 이 곡절의 알고리즘은 어디서 자라기 시작한 걸까. 뉴스에선 또 한 명의 목숨이 세상을 떴다고 알려오던 날, 난 새삼 이 박스 하나가 애처롭다 느껴졌다.


우리 아파트 단지에 C 택배회사 트럭은 저녁 8시 쯤 도착한다. 우체국은 대부분 점심 시간이 끝난 1~2시 즈음에 아파트 단지를 돌기 시작하고, L 택배회사는 C 보다 빨리, 그리고 D 보다는 늦게 도착한다. 이건 모두 내가 대부분의 날들을 집에서 보내기 시작하며 알게된 일련의 아파트 시간표인데, 그건 곧 우리 아파트엔 택배 배달과 함께 굴러가는 하루가 어김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궁색한 일상은 굳이 말할 필요도(가) 없지만, 세상은 어느새 택배 없이 돌아갈 수 없는 ‘배달 의존형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코로나 이후 배달은 더욱더 필수불가결의 ‘수단'이 되어버렸지만, 그만큼 잡음은 늘고 해소되지 못한 ‘왜', ‘때문에'는 여전히 대답되지 못한 채 또 하나의 ‘취급 불가물'을 남긴다. 우리 일상에, 그리고 너와 나의 집앞 문앞에. 인천시가 새로운 쓰레기 매립장을 확보했다는 뉴스가 보도된 날, 난 또 쌓여있는 택배 박스를 내다버리며 ‘근데 이건 정말 필요한 일인가' 씩식대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저 귀찮음에 심통이 내뱉은 말인지 모르지만, 실제 그렇기도 하지만, 정말 우리에겐 (이만큼의) 배달이 필요할까. 그만큼 우린 바쁘게 살고있을까. 다시 쓰고 새로 쓰고 재활용 운동의 선구자인 나가오카 켄메이는 ‘우린 정말 배달을 할 정도로 바쁜가'란 말을 한 적이 있다.


택배엔, 어쩌면 택배의 시간이 있다. 새벽, 햇빛, 총알 배송을 이야기하는 도시에서 그건 엉간생심,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마는 이미 과거형의 시간들일 뿐이지만, 내가 기억하는 택배란 곧 ‘기다림'의 시간이기도 하다. 난 주로 일본의 아마죤을 자주 이용하는데 처음 느낀 건 ‘어, 의외로 빠르다'였던 것 같다. 프리미엄이 아닌 일반 회원 서비스를 활용해도 길어서 4~5일을 넘기지 않는다. 트럭을 타고, 어쩌면 열차를, 그리고 바다를 건너 우리집 앞까지 4일, 아니면 5일. 뭐 하나 급한 것도 없으면서 난 매일같이 사이트에 들어가 배송 조회 버튼을 클릭클릭 하곤 했는데, 택배는 그런 ‘기다림의 시간'으로 성립되는 배달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오래 전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 오지않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애타며 손꼽았던 것처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리고 곧 도착해 나의 일상이 될 무언가를 마주하기 전, 어떤 마음가짐의 4일, 아니면 5일. 그건 분명 '사람의 자리'가 아닐까 그런 시간에 아마 아날로그의 일상이 자라는 게 아닐까. 빠름을 걷어낸, 불필요한 필요를 지워낸, 너와 나의 가장 기본적인 보편의 하루와 또 하루. 가게에 가지 않고도 산다는 건 단순히 빠르고 간편히 쇼핑이 되어버리는 도시의 효율일지 모르지만, 그 효율엔 보이지 않는 애씀의 시간이 묻어있고, 자꾸만 빨라지는 이 도시의 배송 시간은 그 ‘기다림’을 지워내려 한다. ‘기다림'이라는 건, 사실 내가 아닌 타인의 시간이기도 하다.


또 한 번 택배 박스를 버리고 돌아오는 아파트 단지 엘리베이터 앞. 16층에 멈춘 승강기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만 있다보면 엘레베이터와 나 사이의 타이밍은 매우 예민한 문제가 되어버리는데, 그날의 엘레베이터는 각층을 모두 다 돌기라도 할 작정인지, 마치 계단을 내려오는 것처럼 15, 14, 13, 층마다 서고, 서고 또 서고 멈추고 있었다. 어린애의 장난? 아니면 더위먹은 기계의 말도 안되는 고장? 결국 나의 쓸데없는 잔머리는 ‘이건 택배의 짓'이라고 결론내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새삼 아파트에서 둘, 혹은 셋 이상의 택배 수화물은 어떤 식으로 배달을 (해야)하나. 엘레베이터 문 앞에서 타지도 못하고 씩씩대고 있는 난 그저 짜증 밖에 낼 수 없었지만, 나의 이 한없는 기다림 외에 여기에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아무리 속좁은 나라고 해도 한층 한층 배달하라고 말할 자신, 용기는 별로 없다. 그러는 사이 내가 아닌 그, 불특정 다수의 택배를 끌어안고 있는 배달원은 더 알 수 없는, 요지경 속 기다림의 구렁에 빠져버릴 테니까. 그러니까 나의 기다림은 타인의 ‘효율적' 노동을 위해 희생이 되어야 하나. 그런데 그건 정당한, 효율의 희생인가. 아니면 정반대의 고생과 그저 배부른 짜증인가. 드디어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이상하게 사람은 누구도 보이지 않았고, 난 정체없는, 영문모를 허무함에 마음이 가볍고 또 무거웠다. 누구도 득을 보지 못하는 장사. 어쩌면 우린 조금씩 고장이 났는지 모른다.


파업을 한다. 새벽 주문을 시킨다. 배달 음식 후 플라스틱 용기를 씻어 말리고, 이미 넘쳐난 수거함에 또 한 덩어리의 수거물을 쑤셔넣는다. 그리고 파업을 한다. 택배는 어느새 일상이 되었지만, 그건 재활용 수거함의 쌓여가는 쓰레기나 빨리 오지않는다며 심통난 소비자 A의 댓글, 때로는 뉴스 속 흘러나오는 아스팔트 위의 목메인, 울분 속의 함성으로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고장난 뒤에 알아차린다. 너무나 당연해져서 벌어지는 것들의 트러블. 당연한 것들이 갖는 말 못할 애처로움의 속사정. 근래 늘어난 택배를 둘러싼 잡음은 코로나 이후 급증한 물량 탓이라고 하지만, 그건 결여된 일상이 뱉어내는 삐거덕 소리이기도 하다. 애초 택배는 ‘빠름'의 서비스가 아니고, 우리의 일상은 야밤에 주문한 커피콩을 새벽에 받아볼 정도로 ‘빠름'을 필요로 하지않고, 그렇게 얻게 된 ‘효율’은 아마 너도 나도 원했던 것이 아니다. 46년 전 창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으로 더 유명한 택배회사 ‘쿠로네코 야마토'의 캐치 카피는 ‘장소에 배달하는 게 아냐, 사람에게 전달하는 거야.’ 야밤에 울린 초인종 소리에 우리집은 돌연 공포 모드가 되어버렸는데, 맘조리다 열어본 문 밖엔 박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왜 하필 그 박스엔 ‘강아지 대통령'이라 적혀있어 우린 또 돌연 웃음 모드가 되었는데, 그 박스는 우리집에 공포를 배달한 것일까, 웃음을 전달한 것일까. 택배 물량이 또 피크를 찍었다 고 보도된 날, 난 그곳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애써 떠올려보려 했다. 사람이 지워진 자리에, 택배 박스 만이 불꺼진 도시를 빙빙 배회하고 있다. 


by ABYSS | 2021/07/07 14:07 | Travelog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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