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13월에 피는 꽃

오랜 기간 문을 닫았던 상상 마당이 재오픈을 한다는 소식에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하마구치 류스케의 국내 공개작 3편의 영화가 주말 내내 상영을 예고하고 있었다. 지난 주 개관한 시모키타자와의 오랜만의 새극장 'K2'에선 개관 기념으로 '말과 탈 것'의 영화란 타이틀로 하마구치 영화의 영화를 돌아보고, 내심 시샘이 났지만 어쩌면 다시 오픈한 상상마당에서 대신할 수 있겠다 조금 신나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늘어나는 확진자 수에 어디에도 적지 않은 계획은 자리를 잃고 애초 생각해보니 일정조차 갈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오는 일요일엔 가족끼리, 몇 해 전부터 우리집의 명절 루틴, 설날 기념 나들이를 떠난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늘 이렇게 너와의 잡음에 삐걱대고 새삼 나 혼자라는 건 어디에도 실현 불가능한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하마구치의 2015년 영화 '해피아워'는, 네 명의 여자 친구 사이 '나', '혼자를 바라보는 긴 여정을 걷는, 무려 다섯 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였다.

일상이 마감이던 시절, 마감은 어쩌면 일상이라기 보다 비일상, 부러 만들어놓은 시간의 어떤 피리어드와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정신이 하나도 없이 매일을 살다 마감이 다가오면 어찌됐든 무언가 끝이나고, 그렇게 또 하나의 시작이 기다리는, 그곳에서만 작용 가능한 어떤 작은 시계의 알람 소리. 그건 어김없이 나의 한 달이고 일주일, 그런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누군가 그려놓은 시간 축에 진입, 그곳을 관통하기 위한 날들이기도 했다. 레터를 보내기 시작해 1년 여. 그 주어진 한 토막 시간이란 얼마나 맘 편안한 거짓말이었을까. 마감을 살며 난 얼마나 나의 일상에 거짓말을 반복해왔던 걸까. 얼마 전 알게된 '천재들의 일과'란 책엔 헤밍웨이, 푸르스트, 움베르토 에코 등 소위 '난 사람'들의 일과를 소개하고, 그건 대부분 새벽형 인간(극도로 아침형이거나 극도로 밤형)에 다름 아니란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누구의,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오직 나 그리고 시간 많이 흐르는 공간. 


사카모토 류이치는 직장암 수술을 받고 1주일 후, 새로운 곡을 만들었는데 그 제목이 Ieta, 일본어를 발음대로 영어로 표기한 '言えた, 말할 수 있었다'였다. 이 단 하나의 진심은 어쩌면 그런 이제야 찾은 '나의 시간'에 대한 소회가 아니었을까. 그는 얼마 전 '악보 스토어'를 오픈했고 '이제는 곡들을 무엇으로든 남겨놓아야겠다고 생각할 나이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란 말을 했다. 결국 쓴다는 건, 시간에 저항하기 위한 나의 유일한 몸짓. 1월이 저물어가는 저녁, 난 머리를 짧게 깎고 어쩌면 조금 새해다운 생각을 했다고...부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by ABYSS | 2022/01/27 15:27 | Ein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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