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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버닝'의 속편일까, 유아인의 얼굴이 이야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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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인의 얼굴이 이야기하는 것. 정확하게 3년 전 '버닝'에 관한 글을 적으며 난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이창동의 여섯 번째 영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옮겨온 작품, 칸느 마지막 날까지 기대를 하게했던 아슬아슬한 후보작. 하지만 유아인이라는 배우, 그 얼굴로 수렴되던 작품. 너머를 바라보는 '부재', 단 몇 분 사이 내리쬐는 햇살의 '찰나' 곁에서 유아인의 그 얼굴, 어디서도 보지 못했을 그 얼굴은 '버닝'의 엔딩이기도 했다. 어쩌면 잊었거나 잃었을, 아니면 하지 않았거나 못했을 세계의, 어쩌다 주인공이 되어버린 비운의 얼굴. 영화는 찌는 여름 트럭 사이로 흘러나오는 담배 연기로 시작해 해미(전종서) 집 벽에서 마주친 이질적인 세계, 그리고 심상치 않은 표정의 종수, 그런 유아인의 얼굴로 문을 연다. 어느 세계의 제시가 아닌, 리액션으로서의 예고. 얼추 10여 년 전 삼청동 언덕 자락의 한 카페에서 '서양 골동양과자점 앤티크'에 출연한 유아인을 만나며 그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들이닥친 시간과의 조우가 그곳에 있었다. "(소설보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었고 감독님이 이야기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시간은 흘러 나는 요즘 집에서 보는 영화가 많고, 그가 지난해 남긴 두 편의 영화 '#살아있다'와 '소리도 없이' 사이에서 '미지'의 세계가 걸어온 또 한 번의 얼굴을 마주했다. 시체 수습을 하며 살아가는 범죄 조직 하청 업자 콤비의 영화. '소리도 없이'는 이렇게 얘기되지만, 어김없이 이건 유아인의 몇 년 후의 지금, 또 한 번의 '이상한 얼굴'의 관한 이야기다. 근데 티 하나 없이 다듬어진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을 달리던 태인(유아인)은 종수의 다음일까, 이전일까. 유아인(태인)은 말을 하지 못한다. 

'소리도 없이'에서 유아인은 좀 짐승같다. 동물이라 하기엔 귀염성이 조금도 없고, 말을 못하는 설정은 흡사 인류 세계의 밖, 문명 이전의 원초적 시간 속에 태인(유아인)을 데려다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형이자 아빠, 하지만 남인 창복(유재명)이 지어줬을 이름 태인은 극에서 발화되는 적이 거의 없고, 유아인은 이 작품을 위해 20kg 정도를 찌었다고 한다. 사실 이 영화는 꽤 많은 게 부딪히는,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묘한 소거법 속에 완성되는데, 그 중심에 오직 계란을 나르고(그런 시늉을 하고) 매뉴얼 대로 시체를 처리하고 파묻고 헛간같은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일어나는 태인, 유아인이 있다. 무엇보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물론 '버닝'의 수상한 팬토마임의 소거법과는 전혀 다르지만, 영화 속 '부정'과 '의심'은 꽤나 주요한 모티브다. 어떤 음소거로서의 장치. 그리고 '버닝'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였는데, 유아인은 경기도 어느 시골에 마련된 자신의 집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까. 입은 옷 안입은 옷, 먹은 음식 먹지 않은 음식이 뒤섞인 몇 평 되지 않을 집에서 해가 뜨면 세수를 하고 문을 닫고 어둠을 사는 태인, 그리고 그의 동생 문주(이가은)는 흡사 소외된, 아니 소리도 없이 묻혀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아니면 직후의 세계'를 은유하고 있는건 아닐까, 착각마저 들게한다. 코로나 시절 30만을 동원한 상업 영화에 이런 얘기가 합당할까 싶지만, 이 영화는 그런 '모순'의 잉태, 기이하고 이질적인 현실의 밑바닥을 찾아보게 하는 구석이 있다. '버닝'과 비슷하게, 또 다르게. 말하자면 창복이 사는대로 따라사는, '말되어지지 않는' 태인의 삶이 보여주는 세상 모든 옳고그름과, 바르고나쁨과 선과악의 리어리티. 그런 아이러니.어떤 폭로의 대리인으로서의 태인은 작동한다. '버닝'을 이야기하며 유아인은 '줄탁동시'란 사자성어를 언급했는데,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의 또 한 번의 '시작'이랄까. 홍의정의 두 번째 영화 '소리도 없이'는 어쩌다 '버닝'과 만났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영화를 자꾸 보다보니 소위 '가족 영화'라 할 만한 것들의 경우의 수가 줄어, '영화나 볼까'라고 이야기하신 엄마 말에 찾고 찾다 점심 후 '소리도 없이'를 틀었다. 이렇게 보는 영화는 제대로 된 감상이 될 수가 없는데, 영화가 끝나고 우리 엄마는 '무슨 영화가 소리도 없이 끝나노?'라고 하셨다. 그냥 웃기만 했지만, 어쩌면 이 말은 영화 '소리도 없이'의 가장 명확한 한 줄일지 모른다. '소리도 없이'는 상업영화 주제에, 장르 영화면서도, 자리에 맞지 않은 욕심을 부린다.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장르 영화의 '새로운 방향성'이라는 것들. 이야기의 중심일 줄 알았던 '시체 수습'은 창복과 태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저 '시늉'을 위한 장식에 불과하고, 오히려 섣불리 갖게되는 선입견에 대한 일침을 위한 재료로 균일하게 쓰인다. 무엇보다 영화의 엔딩. 처음으로 사람을 알고 세상을 홀로 걷기 시작한 태인이 무너지는 대목에서 돌연 필름은 끊긴다. 방향을 잃은 길에서의 질주, 종말 이후 예고되어 있는 시작, 어쩌면 '버닝'의 데지뷔거나, 시작과 끝의 자리 바꾸기. 그리고 상업 영화에서 삐져나온 픽션이 되지 못한 초현실. 시작도 하지 못한 믿음이 붕괴한 뒤 태인은 질주를 멈출 수 없지지만, 길가의 들판과 하늘은 그저 여느 때처럼 맑고 푸르다. '시체 수습'이라는 보통이라면 기절초풍할 일도 일상처럼 살았던 태안과 창복의 삶은 파란 하늘과 푸른 들판만큼 맑고 비어있고, 소리없던 시간이 붕괴되던 날 하나의 현실이 몰락하고 태어난다. 난 영화를 보는 내내 니시카와 미와의 '우리 의사 선생님'이 떠올랐는데, 좀 오버일까. 부조리를 품은 하늘은 때로 무엇보다 투명하고 어떤 믿음은 종종 피를 흘리며 오늘을 연명한다. 소리가 사라진 세상, 착하고 나쁜 너와 내가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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